시로 여는 일상

홍일표 양파의 궤도, 김경숙 눈물겹

생게사부르 2018. 10. 6. 00:14

홍일표


양파의 궤도


 

굶주려 죽은 허공이 알을 낳았다
누구는 맵고 시린 눈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거기 누구 계세요?

 
빈 집 앞에서 보낸 한 철이 있었다

다만 깨어진 항아리와 벽돌 틈새로 들락거리던 바람의 흰 어깨
아무것도 없는 것이 있는 곳
허공의 껍질을 벗기며 중심을 향하던 손발이 길을 잃고 마는 곳

여기가 어디지요?

갑자기 사라진 어제가, 어제의 언약과 어제의 노래와 어제의 연금이

낯설어지고
그때 허공을 동그랗게 말아서 만든 눈알

바라 볼수록 눈이 매운
그리하여 슬쩍 시선을 피하기도 하는
예언처럼 몸 없는 허공이 몸을 낳았다
다시 한 겹 한 겹 공기의 살을 벗겨 내면서


김경숙


눈물 겹


양파는 눈물 뭉치라고 말해놓고
겹겹으로 운다

지난 늦가을 양파 모종을 심을 때
이웃에 사는 황조롱이가
텃밭 근처에 앉아서 혀를 찼는데
나는 한겨울 추위가 이렇게 뭉쳐질 줄 몰랐다
아무래도 양파는 슬픈 식물이어서
고작 껍질만 뒤적거려도 눈물부터 쏟는가보다

아무렴
껍질 없는 슬픔이 어디 있겠는가
누구나 두 눈에 수 천 겹
양파 껍질이 들어 있다는 것
벗기고 벗겨도 남아있는 저녁은 또
속껍질을 글썽이며 어두워진다
소리 없이 눈물만 찔끔거리는 사람과
눈물은 없고 울음만 요란한 새가
같은 일로 울 때가 있듯
익은 봄,
몸통 반 쯤 밖으로 드러내놓고 있는
양파 밭에 가면 동고비 울음소리 요란하다

살짝 벗겨진 양파는 눈물 뭉치
그렇다면 수 천 겹 눈물이 감싸고 있는
눈은 또 얼마나 깊고 슬픈 곳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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