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계산성당과 전주 전동성당
우린나라 성당은 건축물 분위기가 비슷해 보입니다.
약현성당, 명동성당, 대구 계산성당, 전주 전동성당이 고딕과 로마네스크 등의 건축기법이 사용됐는데
초창기 성당이 만들어지는 시기가 대략 1890년에서-1914년이네요.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들어오게 된 게 조금 특이한데 선교사들이 우리땅에 들어오기 전,
선조, 광해군 시기 중국 연경에 드나들던 사신, 역관등을 통해 서학(西學), 즉 책으로 학문으로 먼저 국내에 소개됩니다.
왜란, 호란을 겪은 후고 서구열강에 의한 서세동점의 어수선한 시기여서 혼란기입니다.
양반으로는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남인, 중인, 아녀자 등에 의해 받아들여지다가 제사거부, 초상에서 부모님 위패
를 불살랐던 소위' 진산사건'으로 한국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 권상연의 신해박해(1791)가 발생합니다.
이후, 신유박해(1801) 기해박해(1839) 병인박해(1866)로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희생을 당하지요.
1882년 서양으로는 미국과 최초로 조미 수호통상조약, 1886년 조불수호 통상조약이 조인되어
기독교 선교활동이 어느정도 보장되고 천주교 교세가 확산되는 시점에 성당들이 대거 건립이 되기 시작한 셈입니다.
당시 건물 공사를 주도한 신부님들이 프랑스외방 선교회 소속 그중 특히 프와넬(Poisnel.V.L) 신부님이
여러 곳의 성당 건립에 공이 많으셨네요.
대구 계산 성당
서울, 평양에 이어 우리나라에서는 세번째, 대구(영남지역)에서는 제일 오래 된 고딕 양식의 성당입니다.
당시 조선에는 벽돌로 서양식 집 짓는 건축 기술자들이 없어서 서울 명동 성당 건립에 참여하였던 중국인들이
맡아 1902년에 완공합니다.
원래 1899년 12월 25일 봉헌 축성된 한국식 건축의 십자형 성당이 40일 만인 1900년 2월 대구서 일어났던
지진으로 촛대가 넘어지면서 화재가 발생하여 타 버렸습니다.
당시 김보록(로베로) 신부님이 2월에 다시 성전을 세우기로 계획을 발표하였고, 파리 외방선교회
프와넬 신부님이 적화벽돌 구조로 지었습니다
12사도의 스테인드 글라스와 함석류 등 그 당시 국내에서 구할수 없는 건축자재는 프랑스나 홍콩에서 주문하여
들여와 1902년 5월에 완공되네요.
당시 서상돈, 정규옥 같은 신자들이 있어 재정적인 어려움은 덜 받았다고 합니다.
스테인드 글라스는 열차로 블라디 보스톡을 경유하여 들여왔고, 벽돌공장을 세워 벽돌을 찍어 냈다고 하네요.
건립 당시 2개의 종각때문에" 뾰족탑'이란 애칭이 붙었는데, 2개의 종탑은 건립 당시 서상돈 아우구스띠노
(안면 있는 이름? 국채보상운동 )와 정규옥의 부인 김젤마나가 기증하여 그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1903년 11월 열린 성당 축성식에는 영호남 지역 선교사 대부분이 참석하고 사방 2백리 인근 주민들,
대구감사와 지역유지들이 초대되어 대구전체의 축제가 되었답니다.
당시 기와집과 초가집이 대다수 였던 시대상황을 감안하면 건물만으로도 대단히 유명한 일이었습니다.
1911년 주교좌 성당이 되면서 종각을 두배 높이는 증축 공사를 하여 외곽의 모습이 완성되었습니다.
전통있고 아름다운 성당이어서 결혼식도 많이 이루어지는 명소가 되었고요.
1950년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결혼식도 여기서 이루어졌다는데 당시 주례를 섰던 경북지사가
" 신랑 육영수군과 신부 박정희 양" 으로 호칭했던 일화가 남아있네요.
1984년 5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문했던 흔적으로 기념 성수대가 남아있고, 김수환 추기경이
사제 서품을 받은 곳이기도 합니다.
1981년 110년 오랜 전통을 지닌 성당으로 사적 제290호로 지정되었고
1991년 6월 성당 완공 후 처음으로 보수공사에 착공하여 1992년 8월 공사를 마칩니다.
지붕의 함석을 동판으로 바꾸었고 목재였던 바닥은 대리석으로 교체되었습니다.
현재 창호에 스테인드 글라스 공사를 했고 성당내부 스테인드 글라스 한복 입은 분들이 색 달라 보이더니
조선시대 천주교 박해 순교성인의 모습이랍니다.
전동성당
한국 천주교 순교 1번지이자, 세계교회 사상 유례가 드문 동정부부 순교자가 나온 성지
최초의 순교자는 '진산사건'으로 알려진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연(야고보)입니다.
조선에서는 불교를 배척했기에 성리학 중심의 양반사회에서 하층민, 여성들은 '인간평등 사상과 사후
천당에 갈수 있다는 내세사상으로 정신적 위안을 받을 수 있었기에 신부 한 사람 없었던 상황에서도
천주교는 급속히 확산됩니다.
반면에 양반층에서는 사회모순에 비판적이었던 남인층, 서학이라는 학문으로 접하게 되는 남인 시파 지식인들
(이벽, 이승훈, 정약전)이 신앙공동체를 구성하게 되고, 지역으로는 이양선이 자주 출몰하던 서해안 지역에서
천주교를 먼저 접하게 됩니다 (윤선도 윤씨 집안은 정약용의 외가이기도 함)
정조때도 천주교 문제가 제기 되지만 정조 임금은 다른 어떤 학자들 보다 학문이 깊고 천주교에 대해서도
학문(서학)으로 접하고 있었기에 천주교 박해가 무지막지하게까지 가지는 않습니다.
그러다 순조 때 황사영 백서사건이 발각되어 외세를 끌여들여 나라를 위협하려한다는 위기감과
정치적인 이유로 박해가 깊어집니다.
특히 현실적으로는 우상숭배를 하지 않는 천주교 교리와 조상의 위패를 모시지 않고, 제사를 부정한다는
성리학의 왕권과 효사상이 부딪치면서 먼저 발생하게 됩니다.
윤지충과 권상연이 1791년 신해박해 때 전주 풍남문 밖에서 참수를 당했습니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1801년 신유박해 때는 주문모 신부를 청국에서 입국시킨 '호남의 사도'라 불리는 유항검과 4명의 지도자급
신자들이 같은 곳에서 처형을 당합니다.
이렇게 윤지충과 권상연을 비롯하여 7명이 순교한 전주 풍남문 밖 그 자리는 곧 호남 교회의 모태가 되고
전교의 발상지가 되었습니다. 그 이후 100년 뒤 1891년 전동성당 초대 주임인 프랑스인 보두네 신부는
그 순교 자리를 매입하고 성당 지을 터전을 닦게됩니다.
17년 동안의 준비 끝에 1908년 드디어 건축 공사를 시작했고, 전주부(全州府)의 허가를 얻어
순교자들의 선혈이 어린 남문 밖 성벽의 돌로 주춧돌을 세우고 6년의 노력 끝에 1914년 공사를 완공하니,
호남의 모태 본당인 전동성당이 마침내 그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지요.
전주 전동성당은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으로 동양 최고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며 고색창연한 성당 건물을
중심으로 성당 구내의 모든 건물과 시설들이 고풍스런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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