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서출지
작년 4월 말 여고동창 모임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경주는 어느 시기 어딜 가도 렌즈에 잡는 순간, 신라 천년이 담기고 고풍이 자리 잡습니다.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사금갑(射琴匣)' '거문고 갑을 쏘아라'의 전설이 전해지는 서출지를 찾았습니다.
신라 21대 소지왕(일명 비처왕)이 즉위 10년(488) 못 속에서 나온 노인의 편지 때문에 죽을 위기를 넘겼다는
전설을 간직한 곳입니다.
노인은 글이 써진 봉투를 건넨 뒤 물 속으로 사라졌는데 그 봉투에는
'열어보면 두사람이 죽고 보지 않으면 한사람이 죽는다' 고 적혀 있었답니다.
그 한사람이 왕이라 생각하여 열어 보았고, 거문고 갑을 쏘아 왕을 시해하려 모의한 궁주와 승려를
죽였다는 내용입니다
과거의 역사는 그 당시 사회상황에 비추어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중요한데
삼국이 국가체체로 발전하기 위한 과정에서 불교를 통해 통치이념과 지배체제를 갖추며 국민의 사상을 통일하는
중요한 기로에 서게됩니다. 그러나 남동쪽에 치우쳐서 대륙문화를 받아 들이기 어려웠던 신라에서는
고구려(소수림왕 372 ) 백제(384 침류왕)가 받아들인 불교를 수용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소지왕 10년은 신라에 불교가 공인되기 40년 전입니다.
이미 눌지왕(5C) 때 고구려의 묵호자가 불교를 전하러 왔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소지왕 시대 아도 스님
역시 불교전파에 실패합니다. 법흥왕 15년(527) 이차돈의 순교로 비로소 신라에 불교가 공인됩니다.
당시 신라 귀족들은 민속신앙 특히 조상을 섬기는 신앙이 강해 쉽게 불교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서출지의 전설은 전통적 민속신앙속에 새로운 불교문화가 전래되는 과정에 빚어지는 갈등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삼국유사』에 적힌 내용을 살펴보면 이 연못은 '안압지'처럼 인위적으로 꾸며진 원지(苑池)가 아니라 마을 밖에
자연적으로 생겨난 못으로 보이며 곡지(曲池)의 생김새를 가지고 있다네요.
그러다가 사금갑의 전설이 생겨난 뒤 서출지로 명명되었다고 합니다.
단아한 느낌을 주는 무량사는 지어진지 그렇게 오래되어 보이지 않았습니다.
경주 남산의 국사곡 절터가 있던 곳이라 하는 곳으로 보아 절터가 남아 있던 곳에 절을 다시 지었나 봅니다.
조선1664년(현종 5)에 임적(任勣)이라는 사람이 물 위로 누마루가 돌출한 팔작지붕의 건물을 지어 글을 읽는 한편
경관을 즐겼다고 합니다. 현재 이 건물은 폐가가 되기는 했으나 서출지의 서북쪽 구석진 물가에 소박하면서도
우아한 자태를 유지하고 있어서 연못의 경관을 돋보이게 해주고 있으며,
추녀에는 ‘이요당(二樂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자연 그대로의 유수지(溜水池)이기는 하나 주변의 경관이 수려하여 경승지가 되고 있으며
건물을 감싸면서 우거진 여러 그루의 팽나무고목과 물가의 배롱나무들, 때에 맞추어 피는 연꽃 등이 원지에
못지않는 소박한 아름다움을 주며 야경 또한 볼만하여 즐겨 찾는 장소가 되고 있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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