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여행의 기록/이웃지역 경남 이외 지역

낙안읍성

생게사부르 2017. 7. 5. 07:13

 

낙안 읍성

 

 

현존하는 조선시대 읍성이 거의 없습니다.

오랜세월을 거쳐오는 동안 파손되거나 그 당시 쌓았던 성벽의을 뻬내서 여기저기 사용을 해 버린 경우도 많고요.

그래서 동헌, 객사, 옥사 등 배치와 민가가 읍성으로서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기에 '낙안 읍성'이 유명한 것이겠지요.

물론 너무 일찍부터 읍성으로 관광지로 개발된 탓인지 가옥 하나하나마다 상품같은 분위기이긴 했습니다만

그래도 우리의 전통사회를 알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고 특히 외국인들이 좋아할 만한 우리의 전통 마을이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웅천 읍성의 석축이 부분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예입니다 

 

 

 

 

으레 전통은 그렇습니다. 과거 없는 현재가 없지요.

낙안 읍성의 역사 역시 고려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고려태조 23년(940년)에 낙안국(양악)으로 개칭된 이래

조선 태조 6년(1397년) 낙안태생 김빈길 장군이 토성을 축조했고 조선 세종 6년(1424년) 석성으로 개축했습니다

 

고려 말에 창궐하던 왜구가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안동 같은 내륙에도 피해를 준 걸로 보아곡창지대이던 전라도 해안지방은 말할 필요도 없었겠지요.

 

농경지가 없어 쌀이 부족한 대마도를 근거지로 하는 왜구는 조선건국 이후에도 근절되지 않았습니다.조선 세종대 이종무로 하여금 대마도를 정벌하러 보내기까지 하니까요.그 즈음 읍성이 건설되기 시작하여 임진왜란에서까지 읍의 백성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다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조선 인조 4~6년(1626~1628년) 임경업장군이 석성을 중수한 이래로 1983년 6월 14일 사적 제 302호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2011년 3월29일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되었습니다

 

낙안읍성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지방계획도시로 대한민국 3대 읍성 중 하나이며

연간 120만명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주요 관광지로 CNN선정 대한민국 대표 관광지 16위로 선정되었습니다.

 

98세대 228명이 살고 있으며 308동(본채 147 부속채 161)의 건물과

 성곽 1,410m, 중요민속자료 가옥 9동, 노거수, 객사, 임경업장군비 등 13종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전통 혼례를 치르는 초례청입니다. 시간 여유가 있었다면 한번 해 보고 싶었...

요즘은 딸 아들 결혼식 할 때 부모님 리메이크 웨딩 사진 촬영 많이 하더라구요.

제각기 개성 강한 우리 가족들, 형식적인 거 싫어해서 폼 잡고 찍은 제대로 된 가족사진 하나 없습니다만

왜 거실이나 휴대폰 대문사진에 하나씩은 있잖아요. 정장 차려 입고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

패스했습니다. 젊은 분들은 한 번 찍어보면 좋은 추억이 될거 같아요

 

 

 

 

 

 

 

 

 

 

 

 

 

 

 

 

전라남도 기념물 제133호. 사적 제302호로 지정되어 있는 낙안성내 노거수,

도대체 장정 몇 명쯤이 둘러싸야 손이 맞닿을지 대단한 폭을 지닌 은행나무였습니다.

 

읍성 전체 모양이 풍수지리상으로 배를 닮은 행주(行舟)형이어서 구멍이 뚫리면 침몰한다고 생각하여

마을에 샘도 깊이 파지 않았다고 하며 위의 마을 중앙의 은행나무가 당산나무로 당산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낙안읍성은 동문(樂風樓)과 서문 사이의 거리가 약 430m이고 남문(鎭南樓)에서 객사(客舍) 뒷편의 성벽까지

 거리가 약 330m이며 성벽의 길이는 1,384m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 성안에는 100년생 이상으로 추정되는 노거수 15그루가 자라고 있으며, 그 외 노거수들은

 은행나무 32그루, 팽나무 62그루, 푸조나무 32그루, 개서어나무 22그루, 느티나무 12그루가 있습니다

 객사의 동쪽에는 팽나무 한 그루가, 뒤뜰에는 푸조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습니다. 

 
수령이 100연에서 300- 400년의 세월이 소요되었을 것으로 보여지는 낙안성 내의 노거수들은 일반적으로

 관리가 잘 되어서 오래 살아온 것으로 보이며 읍성을 돌아보는 동안 군데군데 서 있던 이 나무들이

 마을을 전통을 아주 실감있게 살려주고 있었습니다.


 

 

 

 

 

 

 

 

 

 

 

 

역사와 전통이 깊은 곳에는 숱한 이야기들이 전해지는데요.

 

임진왜란시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하여 병사를 모집하자 당시 인구가 많고 예로부터 우국지사가 많았던

 낙안에서는 의병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고 합니다. 의병으로 나서지 못하는 주민들은 군량미를 내 놓거나

 무기를 만들 농기구를 내 놓기도 했고요.

의병과 군량미를 모아 좌수영으로 돌아가던 일행이 위 은행나무 아래를 지나다가 마차 바퀴가 빠져 수리를

하느라 시간을 지체 했습니다.

 

그 시간 낙안에서 순천으로 향하는 길목의 커다란 다리가 큰 굉음과 함께 무너져 내렸습니다.

마차가 고장나지 않았더라면 병사들의 생명이 위험했을테고 군량미를 모두 잃었을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알고 장군과 부장은 아찔한 생각에 가슴을 쓸어 내렸답니다.

낙안읍성의 은행나무 목신(木)이 조화를 부려 일행을 위험에서 구한것이라 여겨지게 되었지요.

 

어떻든 낙안읍성이 가지고 있는 특징을 잘 살려 정월 대보름 민속마당이나 민속축제, 가야금 병창,

국악마당, 전통 음식 페스티벌 등의 행사가 푸짐하게 열리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었습니다.

  

 

 

 

 

 

 

 

 

 

 

 

 

 

 

임경업 장군 기념비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