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이영광 호두나무 아래의 관찰

생게사부르 2018. 5. 10. 08:17

이영광


호두나무 아래의 관찰



너거 부모 살았을 때 잘 하거라던 말은
타관을 오래 떠돈 나에게
무슨 침 뱉는 소리 같았다

나 이제 기울어진 빈집,
정말 바람만이 잘 날 없는 산그늘에 와 생각느니
살았을 적에 잘하는 것이 무슨 소용 있으랴

무대 위에서 잠깐 어른거리는 것은
幕 뒤의 오래고 넓고 깊은 어둠에 잠기기 위한 것,
산다는 것은 호두나무가 그늘을 다섯 배로 늘리는 동안
의 시간을
멍하니 앉아서 흘러가는 것

그 잠깐의 시간을 부여안고 아득히 헤매었던 잠깐의 꿈
결을 두 손에 들고

산다는 것은, 苦樂을 한데 버무려 짠 단술 한 모금 같은 것
흐르던 물살이 숨 거두고 강바닥에 말라붙었을 때
사랑한다는 것은, 먼지로 흩어진 것들의 흔적 한 톨까지도
끝끝내 기억한다는 것
잘 한다는 것은 죽은 자를 영원히 잊지 못한다는 것,

죽은자가 모두의 기억 속에서 깡그리 죽어 없어진 뒤에도
호두나무 그늘을 갈구리벌레처럼 천천히 기어가
바지에 똥을 묻힌 채 헛간 앞에서 쉬던 생전의 그를,
젖은 날 마당을 지나가는 두꺼비마냥 뒤따라가
그의 자리에 앉아 더불어 쉬는 것,

살아서 잘하는 것이 무슨 소용 있으랴
호두알이 떨어져 구르듯 스러진 그를 사람들은 잊었는데
나무 그늘 사라진 자리, 찬 바람을 배로밀며
눕기 위해 그가 집 안으로 들어오는 것, 아무도 보지 못
하는데

 

 

*       *       *

 

 

이제 ' 너거 부모 살았을 때 잘 하라' '부모 살았을 적 효도하라'

소리 함부로 못하겠다

 

무슨 침 뱉는 소리 같았다니

 

양쪽 부모님 너무 일찍 돌아가셔서 철 들어 효도 할 기회마저 갖지 못했던 탓에

나이들도록 부모님과 함께 오래 사는 사람들이 부럽더니

 

거리나 공원에는 온통 나이드신 어른들

이미 자신이 노인이면서 구십 살, 백살 시부모를 친정부모를 돌봐야하는 가구들이 자꾸 늘어나는 것 같

아서 타깝다

이런 문제는 한 개인이나 가구가 아니라 사회나 집단 차원에서 해결책을 내놔야 할 것 같은데

현재의 젊은 이들 상황을 보면... 좀 아득하다

일본도 '고립사' 문제로 지자체가 골머리를 앓는다는데...우리사회도 곧, 아니 이미 닥치고 있는 문제다 

 

살았을 적에 잘 해야 하는 것은 이미 당위고

돌아 가시고 나서도 먼저 가신 분이 존재했음을 그 흔적을 샅샅이 기억하는 일,

살아 있는 동안에는...

 

 

 

 

 

'시로 여는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길상호 아침에 버린 이름  (0) 2018.05.12
박영근 이사  (0) 2018.05.11
이영광 경계  (0) 2018.05.09
김지녀 쿠바에서 방배동으로 가는 버스  (0) 2018.05.06
신철규 밤은 부드러워  (0) 2018.0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