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인서
교행交行
조치원이나 대전역사 지나친 어디쯤
상하행 밤열차가 교행하는 순간
네 눈동자에 침전돼 있던 고요의 밑면을 훑고 가는
서느런 날개바람 같은 것
아직 태어나지 않은 어느 세계의 새벽과
네가 놓쳐버린 풍경들이 마른 그림자로 찍혀 있는
두줄의 필름
흐린 잔상들을 재빨리 빛의 얼굴로 바꿔 읽는
네 눈 속 깊은 어둠
실선의 선로사이를 높이 흐르는
가상의 선로가 따로 있어
보이지 않는 무한의 표면을
끝내 인화되지 못한 빛이 젖은 날개로 스쳐가고 있다
1960. 경북영천
2001. 계간 ' 시와 시학' 등단
시집: '그는 늘 왼쪽에 앉는다' ' 여우'
* * *
밤 열차가 교행하는 순간 던져진 빛의 잔상을 통해 존재와 시간의 본질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본다.
조치원이나 대전역사를 지나친 여로의 중간 어디쯤 느닷없이 교행하는 열차를 보며 퍼뜩 정신이 드는,
무감각하게 지나던 인생의 행로에서 갑자스럽게 감지하게 되는 존재의 본질에 대한 직관이 그려졌다.
밤 열차가 교행하는 순간의 뚜렷한 두 줄기 빛은 지나온 과거와 다가올 미래의 시간을 감각적으로 체현한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어느 세계의 새벽' 과 ' 놓쳐버린 풍경들이 마른 그림자로 찍혀 있는 두줄의 필름'
이 고요하게 침전되어 있던 의식을 깨우며 선명하게 각인된다.
빛의 잔상처럼 무한대로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이야말로 가시적인 세계에서 망각하고 있는 존재의 본질
일 것이다. 육안으로 보이는 실선의 선로 위로는, 보이지는 않지만 길고 뚜렷한 무한의 선로가 있어 우리
를 이끌어 가는 것이리라.
일상의 순간들에서 현상의 표층을 넘어서는 존재의 본질을 끌어내는 시인의 통찰력은 남다르다.
이혜원 문학평론가(고대문창가 교수)의 해설에서 가져 온 내용입니다.
한마디로 류인서 시인은 ' 사물의 표층을 꿰뚫는 날카로움을 투시하는 시선으로 존재의 본질을 새롭게
발견하며 감정을 싣지 않은 투명함으로 내면의 세계를 확장하는 시인으로 평하고 있습니다.
사물과 일상에 대한 뿌리를 찾아 본질적인 의문을 집요하게 지향하는 것은
사물의 유약함과 덧없음이 존재의 모습과 별개의 것이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물의 이치와 핵심이 존재의 본원에 맞닿아 있다는 생각은 필연적으로 현상너머의 내면에 대한 관심으로
귀결될 것입니다...얼마나 집요하냐의 차이
그냥 시는 시로서 읽으면 되지, 해설이 왜 필요하냐는 사람도 있고
시인은 그냥 시를 썼을 뿐 그렇게 많은 의미를 함의하지 않았음에도 해설하는 사람에 의해
속된 말로 시가 ' 더 있어 보이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불평하기도 합니다.
특히 경쟁이 심한 자본의 사회에서 ' 상품'의 질이 훌륭하더라도 그걸 담는 용기나 포장이 허술하고
소홀하면 소비자들이 제 값어치를 알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정신적인 창작의 영역인 시를 일반적인 상품과 비교하기 어렵겠지만
광고와 홍보 출판마켓팅이 엄연한 산업의 한 영역이고 시인 또한 출판시장에서 개인의 값을
올려 최소한 손해를 보이지는 않아야하고 보면...
'좋은 시'에 그 좋은 시를 더욱 빛나게 해줄 해설이라면 금상첨화일 것입니다만
세상은 꼭 그렇지만도 않아서 ' 별 좋지도 않은 시'를 포장만 그럴 듯하게해서 부풀려 놓는 경우도 많습니다.
시를 해설 할 필요가 있는가?
수능에서 출제한 어떤 시를 그 시를 지은 시인에게 풀게 했더니 다 못 풀고 틀리더라는 얘기가
다소 자조적이지만
' 시인은 시인으로 태어나는 것'일 뿐 시를 공부한다는 게 가능한지는 별도의 문제로 치고
시 창작 과정에 있는 사람들에게 시 해설이 상당한 길잡이가 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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