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백상웅 무릎

생게사부르 2018. 1. 11. 22:08

백상웅


무릎


저 골목은 무릎을 펴본 적이 없다
좌판 뒤에 쭈그려 앉은 헐렁한 무릎들,
제 무르팍을 깎는 줄도 모르고 감자를 깎는다
내가 다 무릎이 시려 낮잠을 설치겠다
골목과 골목을 잇는 동안 관절염을 앓았나,
허리까지 몸빼를 올려 입은 길이 비쩍 말랐다
무릎이 귀 위로 올라 가는 시간, 무릎들은
그늘진 자리에 붉은 다라이를 낳았다
그 속엔 벌레 먹은 단감, 비린내 심한 고등어
구멍숭숭한 알밤, 차갑게 식은 떡....
나는 남부 청과물 이층에서 골목을 내려다봤다
제대로 진설도 하지 않고 국밥을 말아먹는,
제 손으로 젯밥을 챙겨먹는 무릎들
나를 무릎에 앉혀 키웠던 무릎도
전화를 걸어와 뼈가 저리단다, 엄마처럼
주름을 얹은 무릎들은 골목에 가만히 앉아서
세상 모든 식당의 문지방을 넘어다녔겠다
냄비 속으로 들어가 구름의 꽁무니를 쫒거나
텅빈 버스를 타고 동네 바깥으로 나가기도 했겠다
저 무릎들은 말없이 앉아 나사를 조일 뿐,
골목에서 해고 당할 일 없어 화석처럼 살아 남았다
무릎이 사라지면 골목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세상의 물렁뼈는 똑똑 소리를 내며 물팍을 꿇어버리겠다
골목이 좌판을 접으면 몸빼를 벗는 길
하늘이 대신 멍든 감자를 깎는다
살갗 벗겨진 달의 무릎이 이지러지고 있다

 

 

 

       

 

      사진: 카페 두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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