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문화권 2.
백제무왕의 탄생에 얽힌 궁남지는 아이들 수학여행 철에 갔을 때는 연꽃이 가득했다는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아이들을 인솔하고 가는 여행은 아무리 좋은 곳을 가도 ' 여행의 자유로움을 느끼거나' '감상'을 할수 있는 처지가
아니기에 큰 뭉텅이 기억만으로도 감지덕지하지요.
작년 겨울 다시 백제권을 찾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겨울철이라 좀 황량했고,
그 사이에 '서동요'에 나오던 무왕과 선화공주의 로맨스에 의혹이 생기는 자료가 2009년 새로 나와
익산 미륵사를 발원한 사람은 백제 무왕의 왕비인 '사택지적 딸'이란 기록이 나왔습니다.
역사는 소설이나 드라마 처럼 허구나 가공이 아니어서, 보다 확실한 객관적인 자료가 나오면 그 내용이
달라질 수 있는 개연성은 항상 존재합니다.
천마총이 '지증왕이나 자비왕의 무덤 일 가능성이 높다'라고 추측하듯이
우리나라 왕릉의 대부분이 그 무덤의 주인공을
추측하는 상황에서 묘지석과 매지권이 나와 그 무덤의 주인공을 정확히 알려 준 무령왕릉.
무령왕릉은 송산리 고분군에 속하며 1971년 7월 5일 5, 6호분의 배수로 공사 중 우연히 발견되었습니다.
무덤입구는 벽돌과 백회로 빈틈없이 밀봉되어 있었고, 도굴의 피해를 입지 않은 상태였으며
고분의 축조연대와 피장자가 분명한, 도굴의 피해를 전혀 입지 않은 상태로 껴묻거리가 고스란히 발견되어
삼국시대 고분 연구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고분의 구조는 중국 남조에서 유행하던 벽돌무덤 전축분[塼築墳]의 형식을 모방하고 있습니다.
" 아름답고 또렷한 연화문 현실, 벽마다 벽돌 틈으로 나무 뿌리들이 흐트러진 실처럼 늘어져 있었고,
바닥에도 나무뿌리들이 수세미처럼 솟아나와 있었다.
벽면에 만들어진 5개의 하트형 감(龕)에는 타다 남은 심지가 그대로 붙어 있는 백자등잔이 하나씩 놓여 있었다."
1450년 전 무령왕이 우리 앞에 '홀연히' 나타났다는 표현처럼
무녕왕릉은 그 발굴도 우연히 이루어졌다시피 발굴자체에 얽힌 에피소드들도 참으로 많습니다.
우리나라 고고학 발굴의 산 증인일 수 있는 조유전(마산 출생)씨의 ' 발굴 이야기' 나 ' 한국사 미스테리'를 보면
고고학이 참으로 매력있는 학문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서 고고학이 근대 학문으로 시작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서입니다.
그 전은 육감적으로 입구를 알아내서 문화재를 꺼집어 내 가는 도굴이거나, 아니면 토지를 개발하다가
우연히 발견되는 경우들이었지요. 함안에서 초등학교를 다닌 친구는 학교 화단에서 청소를 하다가도
깨진 토기를 발견하는 일이 흔했다고하고 뒷산에서는 깨지지 않은 완전한 토기들도 자주 나왔다고 하니까요.
고구려와 백제는 무덤의 양식자체가 횡혈실 석실분(굴식 돌방무덤)이라 입구만 발견해서 들어가면 무덤의
내부가 큰 방으로 연결이 되면서 뚫여버려서 해방이후 무덤을 열면 대부분 도굴이 되어 버린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반면에 신라는 수혈식 목곽분으로 적석분이라 시신과 부장품을 묻고 그 위에 작은 자갈을 깔아 덮어버린 상태에서
흙으로 봉분을 만드는 형태이니 도굴 자체가 어려워 발굴이 성과를 거두게 되지요.
그런 상태에서 무령왕릉은 처녀분으로 통채로 발굴이 되어 공주 박물관을 하나 새로 지을 정도였으니 대단한 발굴이었습니다만
1970년대 고고학의 학문 수준이나 발굴 수준이 아직 부족하던 단계라 발굴을 주도한 분들조차
무령왕능의 발굴을 ' 회한'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조유전 경기도문화재연구원장·
前국립민속박물관관장 (지금은 공직에서 퇴직하셨음)
고고학적 발굴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하나의 소망이 있다. 중국 진시황릉이나 이집트 파라오 무덤의 발굴처럼 세상을 놀라게 할 위대한 발굴을 자신의 손으로 해 봤으면 하는 꿈이다.
돌이켜 보면 나에게도 그런 기회가 있었다. 공주의 무령왕릉 발굴이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인생에 있어서 영광과 동시에 후회를 안겨 준 발굴이었다.....중략....
바로 백제 사마왕, 무령왕(재위기간 501~523) 부부의 무덤이었다. 백제의 수많은 고분 중에서 처음이자 지금껏 유일한 왕릉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무령왕의 무덤입니다. 왕과 왕비를 기록한 지석이 있고 도굴된 흔적이 전혀 없는 무덤입니다." 김 단장의 말에 모두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이후 주변에선 여러 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왕릉을 파헤치자 하늘이 노해 갑자기 소낙비가 쏟아졌다." "무덤 입구를 여는 순간, 무령왕의 영혼이 하얀 수증기가 되어 흘러나왔다." "바깥 공기 때문에 안에 있던 유물들이 금세 썩어버렸다." 기자들과 구경꾼들은 빨리 내부를 보여 달라고 아우성쳤고, 그 사이 구경꾼은 수백명을 헤아릴 정도로 몰려들었다.
발굴단은 사람들을 통제할 수단도 없었고 한동안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무덤을 폐쇄한 뒤 내부 조사는 신중히 하자던 당초 결정도 흔들렸다. 기자와 구경꾼들이 몰려 있는 상태에서 조사를 더이상 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이러다간 큰일 나겠습니다." "어떻게든 빨리 끝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언론에 먼저 내부를 공개하고 수습에 들어갑시다." 하지만 언론에 내부를 공개하자, 구경꾼들도 덩달아 공개하라고 나섰다.
발굴단은 무덤 내부의 유물을 빨리 수습해야만 이런 분위기를 잠재울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결국 서둘러 야간발굴을 강행했고, 이튿날 아침 9시까지 왕의 시신 머리에 씌웠던 금장식, 왕비의 베개, 은팔찌, 동거울, 중국 자기와 중국 돈 등 108종 4000여점을 찾아냈다. 그러나 시간에 쫓겨 큰 유물만 대충 위치를 표시하고, 나머지는 무덤 바닥에서 훑어내 꽃삽으로 쓸어 담았다. 하룻밤 새 왕릉 발굴이란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왕릉에서 나온 유물들 덕에 백제의 역사를 다시 쓰는 계기가 됐지만 학술적인 자료를 얻을 기회는 놓치고 말았다. 유리구슬 수천 점이 나왔지만 이게 팔에 매단 것인지, 목에 건 것인지도 모르고 쓸어 담기에 바빴다. 당시 고분 안의 온도가 어떻게 됐는지 기초 조사도 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유물을 주워담는 수준에 그치고 말았다. 사실 장비도 카메라가 1대 있었고, 야간발굴을 위한 발전기도 공주 군청에서 빌린 게 고작이었다.
고대 백제사의 비밀을 풀어줄 블랙박스 무령왕릉 발굴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왕릉을 단 하루 만에 발굴한 것은 어떤 후진국에서도 하지 않는 일이다. 당시 30세의 젊은 나이에 발굴 요원으로 참가한 것은 영광이었지만, 평생을 유적 발굴에 몸담아 온 나로서는 지금도 무령왕릉 얘기만 나오면 몸 둘 바를 모른다. 만약에 다시 그런 기회가 온다면 발견 당시의 실내공기와 같은 수준으로 유지해 치밀한 조사계획을 세우고 모든 조사방법을 동원해 1년이든 2년이든 최선을 다할 텐데…. 나는 요즘도 발굴현장을 찾으면 후배들에게 후회 없는 조사를 부탁한다. 한번 실수한 발굴은 영원히 돌이킬 수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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