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김충규 이별 후의 장례식, 유리창과 바람과 사람

생게사부르 2017. 11. 18. 00:54

이별 후의 장례식/ 김충규


 

너를 내 속의 무덤에 묻겠다고 쓴 네 편지를 받고 당혹스러웠다. 편지를 읽기 전까지 나
도 너를 내 속의 무덤에 묻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편지를 찢으며 봉분을 다졌다. 나를 지
켜보고 선 살구나무가 풋 살구를 톡톡 떨궜다. 풋 살구를 한 입 깨물었다. 한 때 너는 나의 나
무에 열려 있던 붉은 살구였다, 지금은 서로 장례식을 치르지만. 먼 하늘가에서 몰려 온 먹
구름이 제 몸을 잘게 찢었다. 우우우-, 미친 늑대처럼 빗줄기가 울부짖었다. 내 몸은 빗줄
기에 후줄근히 젖어 들었다. 내 속의 무덤은 빗소리에 흠뻑 젖었다. 한순간 내 속이 자궁으
로 변했다. 망할 것, 나는 너를 낳고 싶었다.


 

유리창과 바람과 사람

 

 

 

유리창에서 바람이 미끌어진다

곳에서 우리집 쪽으로 하염없이 밀려와

발코니 유리창에서 그만 미끄러진다

저 바람의 숙박은 대체 어디여야 하는

한 때 내가 나를 들판에 버려서

어디 향할지 몰라 허둥거리던 영혼을 보는 듯

기실 저 바람이란 누군가의 영혼이 떠도는 것인지 몰라

유리창에 부딪쳐 피 흘리는 바람의 영혼이 측은

눈길을 피한들 내 영혼의 숙박이 온전한 건 아니다

영혼이 매일 변신을 거듭한다면 모를 일이나

저리 미끄러진 바람은 절룩일망정 변신하지 못 할

것이다

바람의 육체가 수시로 변한다고 믿는 건

사람의 어리석음일 뿐

한번 얻은 육체는 바람도 사람도 어쩌지를 못하는 법

하여 서럽기도 하고 생이 두렵기도 하고

유리창에 미끄러지기도 하는 것

저렇게 살다 죽더라도 바람이 묘비명을 남길 일은 없 듯

내 가련한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순간이 오더라도

나는 묘비명을 남기지 않을 것이다

그저 세상이라는 유리벽에 반복적으로 미끌어져지다

일생을 훌쩍 허비한 것에 불과할 테지만

앞을 가로막은 유리창을 원망할 필요는 없는 것

바람은 바람없는 영원의 숙박을

사람은 사람 없는 영원의 숙박을

그나 나나 死後는 그리 고요하면 그만.

 

 

1965-2012( 47세) 경남 진주

1998. 문학동네 신인상

시집: 낙타는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그녀가 내 멍을 핥을 때

       물 위에 찍힌 발자국,

       아무 망설임 없이,

       라일락과 고래와 내사람(유고시집)

수상: 제 1회 미네르마바 작품상

       제 1회 김춘수 문학상

 

 

 

멕시코시티 우남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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