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태준
외할머니의 시 외는 소리
내 어릴 적 어느날 외할머니의 시외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머니가 노랗게 익은 뭉뚝한 노각을 따서
밭에서 막 돌아 오셨을 때였습니다
누나가 빨랫줄에 널어 놓은 헐렁하고 지루하고
긴 여름을 걷어 안고 있을 때 였습니다
외할머니는 가슴속에서 맑고 푸르게 차오른
천수를 떠내셨습니다
불어오는 바람을 등지고
곡식을 까부르듯이 키로 곡식을 까부르듯이
시를 외셨습니다.
해마다 봄이면 외할머니의 밭에 자라 오르던
보리순 같은 노래였습니다
나는 할머니의 시 외는 소리가 울렁출렁하며
마당을 지나 삽작을 지나 뒷산으로 앞개울로
골목으로 하늘로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 해 보니 석류꽃이
피어 있었고 뻐꾸기가 울고 있었고 저녁때의
햇빛이 부근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외할머니는 시를 절반 쯤 외시곤 당신의
등 뒤에 낯선 누군가가 얄궂게 우뚝 서 있기라도
했을 때 처럼 소스라치며
남세스러워라. 남세스러워라
당신이 왼 시의 노래를 너른 치마에 주섬주섬
주워 담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외할머니의 시 외는 소리를 몰래 들은 어머니와
누나가 석류꽃과 뻐꾸기와 햇빛과 내가
외할머니의 처마에 그만 함께 폭 싸였습니다
* * *
우리의 외할머니들...
열살이 넘으면 좀 살만한 집에 아이를 봐 주러 가거나 허드렛일을 도우고
곡식이나마 얻어와 생계에 보탬이 되던,
먹을 양식이 부족해 타의로 자의로 근로정신대로 나서기도 했던,
꽃다운 열 여덟이면 아이 엄마가 되어 생활전선에서 헤어 나기 힘든 삶들
시절이 좋았더라면, 생계의 부담이 좀만 적었던들
그 시절 할머니들이라고 교육을 받고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을까요?
의식주 해결에 급급했기에 '자아 실현'은 언감생심 꿈꾸어보지 못했고,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아 볼 엄두를
내지 못했던 우리의 할머니들...
우리의 외할머니 박 야무치 여사는 그림에 소질이 있었다던데 십남매를 낳아 키우셨으니...
다음 생에서는 화가의 꿈을 이루셨을까요?
시를 외우던 외할머니가...화들짝 ' 아이구! 남세스러워라'
그런 시절을 사신 우리의 할머니들이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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