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유홍준 시, 시교실

유홍준 하품하는 책

생게사부르 2017. 10. 30. 02:18

유홍준

 

 

하품하는 책

 


 

이 책은 주둥이가 지퍼로 잠겨져 있다
이만오천오백오십 페이지의 이 책은
말할 수 없이 고독하다
허리춤이 단단한 쇠단추로 채워졌다
이 책은 두껍고 이 책은 무겁다
이 책은 가죽을 둘러쌌다
이 책은 가장 많이 팔리고

가장 오래 읽힌다 이 책은
표지만 보아온 자들도 내용을 다 안다
행간의 징.검.다.리 밟고 강을 건넌다 이 책의
화자는 늘 잠언을 섞어 말한다
잠의 언어들로 가득 찼다 이 책은 게으르고
멍청한, 하품하는 개 같다 이 책은
눈물이 없다 웃음이 없다 눈곱만 가득하다
영원한 잠 속으로 들어가는 자들의 무덤에
산 자들은 이 책을 넣어준다 이 책은 검은 활자들로
가득 차 있다 이 책은 매장된다 영원히
주둥이가 지퍼로 잠겨진 채.

 

 

 

     - 시집『喪家에 모인 구두들』(실천문학사, 2004)

 

 

*         *          *

 

 

이렇게 하품하는 책을 두고도

어제 '괴산 연풍성지'에는 순례객들이 타고 온 차량으로 붐벼서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평소 신도가 40여명 밖에 안되는 시골마을 성당에서 미사를 본 신도가 족히 천명은 넘었을테다.

세상살이가 불확실하고 제도권 정치를 믿을수 없을 수록 자기중심은 자기가 알아서 잡아야하니...

교회나 절 참 신앙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어서 시에서는 조롱을 받는 분위기지만

그것도 애정이 없으면 불가능 하기에... 아픈 애정일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