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허은실 야릇, 문정희 쓸쓸

생게사부르 2017. 10. 15. 08:42

허은실

 

 

야릇,

 

 

 

누군가 나를 뒤집어 쓰고 있어

 

병을 불러 아픈 날

곁에 누워 얼굴을 쓰다듬는 계집아이

돌아보면 할머니가 꽃을 안고 웃고 있다

 

어느 저녁엔

내 몸에 살림 차린 이들

밥물 끓는 소리

 

등본은 발급되지 않고

번지수가 없어

오늘도 짐 풀지 못한 채

마루 끝에 앉아 있다

 

누가 불러 나갔는데

나무들 무얼 숨기고 있는지

이파리 하나 흔들거리지 않고

누가 깨워 눈떴는데

벽지 꽃무늬 사이로

사라진 옷자락만

 

오래 집 비우고 돌아온 날

후다닥 숨는 기척

커튼 뒤의 수근거림

 

어둔 창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나를 닮은 이 있네

문득 나 또한 누군가의 몸에

세 든 것을 알았네

 

 

 

 

문정희

 

쓸쓸


요즘 내가 즐겨 입는 옷은 쓸쓸이네
아침에 일어나 이 옷을 입으면
소름처럼 전신을 에워싸는 삭풍의 감촉
더 깊어질 수 없을 만큼 처연한 가을 빗소리
사방을 크게 둘러보아도 내 허리를 감싸주는 것은
오직 이것 뿐이네

우적우적 혼자 밥을 먹을 때에도
식어버린 커피를 괜히 홀짝거릴 때에도
목구멍으로 오롯이 넘어가는 쓸쓸!

손글씨로 써 보네 산이 두개나 위로 겹쳐 있고
그 아래 구불구불 강물이 흐르는
단아한 적막 강산의 구도 !
길을 걸으면 마른 가지 흔들리듯 다가가는
수많은 쓸쓸을 만나네
사람들의 옷깃에 검불처럼 얹혀 있는 쓸쓸을
손으로 살며시 떼어주기도 하네
지상에 밤이오면 그에게 술 한잔 권할 때도 있네
그리고 옷을 벗고 무념(無念)의 이불 속에
알몸을 넣으면
거기 기다렸다는 듯이
와락 나를 끌어 안는 쓸쓸

    

 

*     *     *

 

 

야릇,

쓸쓸,

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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