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원무현 홍어

생게사부르 2017. 7. 17. 01:21

원무현


홍어


시집간 동생에게서 편지가 왔다

오라버니 이제는 가세가 조금은 일어서
가끔 산에도 올라 간답니다
작년겨울에는 눈구경 갔다가 팔이 부러졌어요
걱정마세요 오라버니
놀다가 부러질 팔도 있다 생각하니
그저 꿈만 같아서
실실 웃음이 다 나옵니다
그건 그렇고 오라버니
팔이 뼛속까지 가려운 걸 보니
이제 깁스를 풀 때가 되어 가는 모양이네요
그 때면 홍어가 제법 삭혀져서 먹을만 할 거네요
....
이제 밥 걱정은 없으니 한번 다녀 가라는 반가운 소식이지만
코가 맵다
눈이 맵다
입 줄인다고
열 네살 나던 그해 남의 집에 던져졌던 동생의 편지는

 

 

*        *        *

 

 

어렵고 힘든 시절, 가정에서는 자주 딸 아이들이 희생을 감수 했습니다

 

공양미에 팔려 가던 심청이 얘기 시절에는 딸 아이가 열살만 넘으면

남의 집에 수양 딸로 보내거나 부잣집에 허드렛 일 이나 아이 보기 같은 일을 하러 갔습니다

일제 강점기 정신대에 나가는 12세 18세 처녀들 역시 그러 했습니다. 

일제가 강제 할당을 해서 감언이설로 꼬우기도 했고, 군수공장 같은데서 일을 하고 돈을 벌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우선 제 한입 '입에 풀 칠'만 해도 그게 어디냐 ... 더하여 월급을 채곡채곡 모으면 부모님 밭뙈기라도 살 수

있을테고, 오빠나 남동생들을 공부시켜 공무원이라도 만들어 보란 듯이 집안을 일으켜 세우리라

 

제 한입 덜어 남은 식구들에게 보탬이 되고 딸 아이 또한 굶지 않기 위해 선택하는 고육지책이었습니다.

그런 딸이나 오누이를 대하는 부모님과 남자 형제들 ...참으로 민망하고 안쓰러웠을 테지요.

 

1989년 소도시에서 여중 3학년 담임을 할 때 학급에서 1,2등 하던 친구가 상담을 청했습니다.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을 해서 대학도 가고 싶은데... 집안 형편이 그럴 수 없다는 거였습니다 .

오빠가 대학을 가야해서 자기까지는 여력이 안되니 여상을 가라고 부모님이 말씀 하셨다는 거였지요.

 

' 여상을 진학하고 졸업하면 너 정도면 은행에 취업 할 수 있을 거야.

 (그 시절에는 상고나 여상을 졸업하면 은행취업이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니가 경제적으로 자립하게되고 못다한 공부를 해야겠다면 그 때 야간 대학이든 계절대학이든 공부를 할 수도

있을거야. 물론 일하면서 공부를 하자면 한 가지만 하는 사람보다는 엄청 힘들긴 하겠지만 꼭 하겠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또 한 가지는 좀 야멸차지만 너 자신의 욕구에만 충실한 선택을 할 수도 있어.

부모님께 죄송하지만 공부만큼은 양보하지 말고 눈 딱 감고 니 희망대로 인문계 진학을 해서 공무원 시험을 칠수도 있어

또 어떻게든 대학까지 공부를 하고 나와서 부모님이나 가정을 위해 더 크게 도움이 되는 방법도 생각 해 볼 수 있고...

(물론 요즘 같으면 굳이 대학진학을 하라고 하지 않았을 텐데 그 시절에는 보수나 사회활동 면에서

고졸, 대졸의 차이가 심하기도 했고 학업 능력이 안되면 모르되 그 학생처럼 공부에 대한 욕구가 많을 경우

시기를 놓치면 후에 본인 스로 후회 할 수도 있고 부모님이나 오빠를 평생 원망하게 될 수도 있기에

당장 눈 앞의 진학만이 아니라 평생을 내다보고 해 준 얘기였습니다).

 

교사는 학생들에게 여러 정보를 주고 선택의 결과들에 대해 예측을 해 줄수 있을 뿐 선택은 오롯이 부모와 학생의 몫입니다

 

그 학생은 여상으로 진학을 했습니다. 그 후 자세한 소식은 못 들었지만 고등학교 과정을 우수하게 보내고

은행에 취업 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교사로서 그 학생만 생각한다며 공부에 대한 그 아이의 재능이 아깝고 능력을 더 크게 키워 또 다른 사회일원이

될 가능성이 있었지만 상급학교 진학은 집안 배경이나 형편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니 특별히 등록금을 마련해서

뒷바라지 할 수 없다면 교사의 역할은 그기까지입니다.

 

하긴 그 친구는 그래도 공부능력이 되니 진로에 유리한 입장이었고 그 당시 공부도 안되고 집안 형편이 좋지 않던

친구들은 중학교 졸업 이후 산업체 학교로 간 친구들도 많았습니다.

 

한일합섬에 다니며 낮에는 옷감보푸라기와 재봉틀 앞에서 일하다가 야간에 학교에 나가던 아이들,

그 보다 열악한 아이들은 부산 '태광실업' 같은 곳으로 일하러 갔습니다.

1996-97년 여중 3학년 담임을 할 때만 해도 졸업 후 태광실업으로 가는 친구들이 간혹 있었습니다

 

요즘은 결혼을 아예 하지 않는 30- 40대 비혼족 부터 시작해서, 결혼을 해도 아이가 없는 가정, 자녀가 있어도 하나

아니면 둘, 오롯이 딸 하나인 가정도 많고 아들보다 딸들이 제 앞가림을 야무지게 해 나가는 경우도 흔합니다.

 

우리 할머니 세대까지만 해도 무학이나 초등학교도 다니다 졸업도 못한 경우도 흔했지만 그 딸들 세대, 그 다음 세대,

내려가면서 초 중등까지는 의무교육이 되었고..또 그다음 세대는 대학 진학율이 84% 까지 올라 갔던 적이 있었습니다.

대학 졸업을 하고도 취업이 안 되는 사회문제가 발생하게 되었지만 먹고사는 최소한의 생존에서 그래도

고등 교육 받을 기회가 많아졌다는 건 양적으로 질적으로 좀 더 ' 인간다운 삶에 접근해서 살 기회' 라고 봐도 될런지요.

 

詩에서는 ' 희생을 감수' 했음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살아서, 먹고 살만한 여동생이' 삭힌 홍어'가 제 맛이 들었으니

오빠에게 한번 다녀가라고 하는 애정 담뿍 담긴 편지를 보내 왔습니다.

오빠는 코가 맵고, 눈이 매운데...

 

'삼합' 이라해서 홍어랑 돼지고기 묵은 김치를 싸 먹어 본 적이 몇 번 있습니다만 호기심에서 먹어 봤을 뿐

깊은 제 맛은 못 느껴 봤지요. 근데 역시 먹어 본 사람이 잘 먹는다고 전라도 쪽이 고향인 분들이 즐기며 맛있게 드시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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