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준
꾀병
나는 유서도 못 쓰고 아팠다 미인은 손으로 내 이마와
자신의 이마를 번갈아 짚었다 "뭐야 내가 더 뜨거운 것 같
아" 미인은 웃으면서 목련꽃같이 커다란 귀걸이를 걸고
문을 나섰다
한 며칠 괜찮다가 꼭 삼 일씩 앓는 것은 내가 이번 생의
장례를 미리 지내는 일이라 생각했다 어렵게 잠이 들면 꿈
의 길섶마다 열꽃이 피었다 나는 자면서도 누가 보고 싶
은 듯이 눈가를 자주 비볐다
힘껏 땀을 흘리고 깨어나면 외출에서 돌아온 미인이 옆
에 잠들어 있었다 새벽 즈음 나의 유언을 받아 적기라도
한듯 피곤에 반쯤 묻힌 미인의 얼굴에는, 언제나 햇빛이
먼저 와 들고 나는 그 볕을 만지는 게 그렇게 좋았다
오늘의 식단
-영(暎)에게
나는 오늘 너를
화구에 밀어넣고
벽제의 긴
언덕을 내려와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냐며
말을 건네는 친구에게
답 대신 근처 식당가로
차를 돌린 나는 오늘 알았다
기억은 간판들처럼
나를 멀리 데려가는 것이었고
울음에는
숨이 들어 있었다
사람의 울음을
슬프게 하는 것은
통곡이 아니라
곡과 곡 사이
급하게 들이마시며 내는
숨의 소리였다
너는 오늘
내가 밀어넣었던
양평해장국 빛이라서
아니면 우리가 시켜 먹던
할머니보쌈이나 유천칡냉면 같은 색이라서
그걸 색(色)이라고 불러도 될까
망설이는 사이에
네 짧은 이름처럼
누워 울고 싶은 오늘
달게 자고
일어난 아침
너에게 받은 생일상을 생각하다
이건 미역국이고 이건 건새우볶음
이건 참치계란부침이야
오늘 이 쌀밥은
뼈처럼 희고
김치는 중국산이라
망자의 모발을 마당에 심고
이듬해 봄을 기다린다는
중국의 어느 소수민족을 생각하는 오늘
바람은
바람이어서
조금 애매한
바람이
바람이 될 때까지
불어서 추운
새들이
아무 나무에나
집을 지을 것 같지는 않은
나는 오늘
[출처] 오늘의 식단 / 박준|작성자 book thief
* * *
산 사람은 살아야하지 않겠느냐
가차왔던 누군가를 화구에 넣고
또는 사랑하던 이를 땅 속에 묻고도
때가되면 뱃속이 염치없이 꼬로록거리며
기별을 한다는 게...삶이다
울음에는 숨이 들어 있다
곡과 곡 사이
급하게 들이마시며 내는
숨의 소리
울음도 한마당 잘 놀고 나면
치유가 되기도 해서
산사람은 어찌해도 또 살아가기 마련이다
자기차례가 올 때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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