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최금진 원룸생활자

생게사부르 2017. 7. 3. 01:47

최금진


 

원룸 생활자


국화 한 뿌리 심을데 없는 가상의 땅에 전입신고를 하고
라면을 끓여 먹다가 쫄깃쫄깃한 혓바닥을 씹는다
파트타임 일용직, 조각난 채 주어진 어느 휴일 아침엔
거울을 보며 낯선 서울 말씨를 연습한다
화분에 심은 쪽파는 독이 올라 눈이 맵고
빛이 안드는 창문엔 억지로 한강의 수로를 끌어들인다
실업수당도 못 받는 개나리들이 대책없이 황사 속으로 출근할 때
누런 걸레 같은 목련이 창문을 닦아내느라 팔목이 홀쭉하다
우리 내일도 만나세, 경로당 노인들은 녹슨 철사 같은 몸으로
오늘의 악수를 내일의 화투짝에까지 잡아보지만
경제적 가치가 없는 것은 사회복지사의 일일 뿐
저녁이면 강에 나가 돌을 던진다
돌멩이가 날아가 떨어지는 지점마다
정신착란의 야경 불빛들이 벌떡 벌떡 일어나 앉는다
정부의 면죄부가 가끔은 공짜 쿠폰처럼 발행되어도 좋을 텐데
투명한 유리컵에 양파를 심으면
이렇게 독거노인으로 살다 죽을 것 같은 노후가
가느다란 실뿌리처럼 아래로 자라는 걸 본다
땅 속으론 지하철이 무덤 같은 터널을 돌아다니고
휴대폰에 뜨는 대출 메시지를 지우다가 모르고 자신까지 지운다
종로에 사과나무를 심자고 노래했던 가수는 곧 환갑이고
사과 한 알씩을 모두에게 나눠 준다면 그는 시장이 될 것이다
오래 묵은 기침은 구겨진 빨래처럼 방바닥에 쌓이고
희망은 결국 자기 암시일 뿐이라는 캄캄한 결론을 베고 누우면
꼭 불꺼진 성냥개비 같은 것이다, 원룸

 

 

 

*         *         *

 

 

현대사회에 들어 우리나라에서는 주거생활로 아파트를 많이 선호했습니다.

주택에 비해 여성들 일손을 덜어줘서 ' 편하다'는 부분에서 그랬고 핵 가족을 중심으로 한 사적공간으로서 편리성외에

새로운 아파트가 분양될 때마다 업그레이드 된 새 집에 살 수 있다거나 특히 분양과 관련한 프리미엄...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여 최근에는 아파트단지 안에 헬스나 골프연습까지 할 수 있는 스포츠 시설에

공원이나 리조트 같은 조경을 갖추어서 주변 여건까지 좋으니 그럴 만도 합니다.

 

'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의 존재이유 입니다'인지 ' 당신의 품격' 인지 그 비슷한 홍보문구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네요

 

외국인들이 한국인 이성친구를 사귈 때 ' 킹덤, 팰리스, 캐슬... 등등 ' 친구가 왕족인 줄 알았다나 뭐라나 하는 얘기,

간혹 어떤 친구는 트리비앙(Tres bien 매우좋은)이라... 다소 실망 했지만 그 아파트도 궁궐 못지 않더라는 얘기,

사실 제대로 자란 교양있는 사람이라면 사람을 만날 때 그렇게 외양에 목 매달지 않고 부모 재력은 어디까지나

부모 능력이지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철저합니다. 만나는 ' 사람 자체'를 중요하게 여겨야지요.

그러나 우리나라는 좀 특이합니다.  

 

직장이 있어 월급을 받아도 왠만해서는 살기 빠듯하고 아이들 교육시키다 보자기 집 한 채 갖기 쉽지 않고

먹고 살다 보면 1억 모으기가 어려운 사람도 많은데, 아파트 분양 받고 돌아서서 팔아 몇 억씩 챙기는 이상한 나라 ,

2-3억 아파트에 매기는 세금이 끌고 다니는 차 한대 세금보다 작은 이상한 나라,

자기가 직접 살지 않는 아파트를 천 몇 백채 씩 소유하면서 사치스런 해외여행이 오로지 직업(?)인 희안한 나라 

아이들이 다니는 학군에 따 아파트 가격이 결정되기도 하고, 부녀회 목소리가 아파트 가격을 죄지우지하기고 하고

주공이나 임대 아파트 아이들과 함께 놀면 품격 떨어진다고 살고 있는 주거로 아이들을 차별하는 희안한 나라

 

물론 이제는 좀 달라 질것 같은 분위기이긴 합니다만...

 

그럼에도 아파트가 만들어지기 시작하던 초창기 아파트를 ' 닭장'이라고 불렀던 적이 있었습니다

 

최금진의 시에서는 아파트도 아닌 원룸 생활자를 얘기하고 있네요.

 

' 국화 한 뿌리 심을데 없는 가상의 땅에 전입신고를 하고 '

실업수당도 못 받는 개나리에, 누런 걸레 같은 목련이라... 아름다움이 생명이어야 할 꽃들마저 하나같이 슬프네요

' 강가에 나가 던지는 돌멩이가 떨어지는 지점마다 정신착란의 야경불빛'이고

'휴대폰에 뜨는 대출 메시지를 지우다가 자기 자신까지 지운'답니다

 

詩 사부께서 제게 최금진시인 같은 시를 쓸 가능성이 많다고 시인의 시집을  찾아 읽으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제 성향이 일부 그렇다는 것을 알면서 일부러 애써 외면하고 다른 류의 시를 많이 찾아 읽었습니다.

아니래도 현실 인식이 그러한데 시 마저 그렇게 쓰려니 너무 희망이 없는 것 같아서요.

 

르노아르가 그랬습니다. 현실에서는 이루기 어려우니 그림이라도 아름답게 그려보고 싶다고...

결국에는 자기 생긴 모양대로 시를 쓰겠지요. 상을 하든 재구성을 하든 화자로 하여금 시를 이끌게 한다지만

결국은 시인의 경험과 정서가 밑바탕에 깔릴테니까요.

 

그나저나 제대로 된 시를 쓸 수 있기나 하려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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