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인물/미술

이중섭 그림은 찐해서 짠하다.

생게사부르 2017. 5. 12. 00:42

이중섭 (1916-1956)

 

 

이중섭의 그림이 유달리 사람들의 마음을 잡아 끄는 이유는 오롯이 '예술이 삶의 전부'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림이 종교이자 사는 이유였던 사람, 이중섭(1916~1956)의 그림은 그래서 찐하고 짠하다.

 

 

 

 

 

이미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사시다가 돌아가셨네

 고흐처럼 삶이 결코 녹록치았던 분,

 

제 식민시기에 태어나서 해방공간에서의 분단, 6.25 전쟁을 거치며 사는 동안 그림을 그리다니

모름지기 남자란 공무원이 되든지 법관 같은 힘있는 직업을 위해 삶의 방향을 잡고 매진을 하는게 미덕이던 시대

그런 사회적 관점에서 딴따라나 그림쟁이가 되어 입에 풀칠이나 할 수 있었으려고요.

 

불행했던 한국 근현대사, 어둠의 터널을 지나면서도 끈질긴 예술혼을 놓지 않으셨던 분,

 

6.25 전쟁으로 피난을 와서 부산, 마산, 통영쪽에도 그 흔적을 조금은 남겨 놓고 가셨습니다.

부산에서는 부두 노동자생활을 하셨고 마산에서는 비바람 막을 방 한칸이 없어 친구들이 십시일반으로 모금을 했다는

얘기나 미술도구를 구하기 어려워 담뱃갑 은박지든 뭐든 손 닿이는 대로 그림을 그렸다는 얘기...

 

그림에 관한 한 대단한 재능과 열정에도 불구하고 그 재능을 맘껏 펼수 있는 여건이 못되어

참으로 삶이 고달팠던 전설적인 화가

 

가난이 일상이, 생계유지조차 어려워 가족과 이별하고 한번 보러 가기도 어려웠던 생활

41세 돌아가실 때 영양실조나 간염의 사인이 결코 그의 삶에서 멀어 보이지 않습니다.

 

2016년 탄생 100주기 기념전시회 그림들입니다.

 

 

 

 

 

 

 

 

 

 

 

 

 

 

 

 



 

 


 

 

 

 

 

 

 

 

 

 

 

 

 

 

 

 

 

 

 

이중섭이 하루종일 소를 관찰하다가 소 주인에게 도둑으로 몰려 고발 당한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에 속한다

 

 

과수원의 가족과 아이들(1950년대)

 

 

 

 

 

 

 

 

 

 

 

 

 

 

 

 

 

 

 

 

 

 

 

평안남도에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일본 유학, 결혼, 한국전쟁, 가족과의 이별, 무연고자로 삶을 마감하기까지

이중섭은 한국의 비극적 역사를 관통하며 예술혼을 불태웠다.

 

 

특히 한국전쟁 후 부산, 제주도에서의 피난생활은 궁핍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제주도에서는 먹을 게 없어서

해초와 게로 연명했고 이때 게를 하도 많이 잡아먹어서 미안한 마음에 작품에 게를 많이 등장시켰다고 한다.

 가난했지만 가족과 함께해서 행복했던 시절도 잠시, 생활고로 인해 일본인 부인과 아들 둘을 일본으로 떠나보내게 된다.

 하지만 이 시기에도 가족을 다시 만날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순진무구한 아름다움을 그렸고,

 가족에게 사랑과 그리움이 묻어나는 그림엽서를 보냈다.

굵고 거침없는 선, 때로는 경쾌하고 유연한 선으로 표현한 이중섭의 그림은 인간에 대한 애정이 넘친다.

일본에 있는 두 아들에게 “아빠가 엄마, 태성이, 태현이를 소달구지에 태우고 따뜻한 남쪽 나라로 가는 그림을 그렸다.

 황소 위에는 구름이 떠 있다”며 ‘길 떠나는 가족’을 그려 보내기도 했고, “아빠가 오늘 종이가 떨어져서 한 장만 그려 보낸다.

 둘이서 사이좋게 기다려다오. 아빠가 가서 자전거 사줄게”라고 애틋한 엽서를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광복 이후 한일 간에 수교가 끊기면서 입국이 불허돼 가족과 생이별을 하게 되었고,

편지에 수없이 쓴 ‘자전거를 사 주겠다’는 약속은 끝내 지키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가족에 대한 그리움, 거처 없이 떠도는 가난한 생활, 예술가로서의 좌절감이 더해져 이중섭은

곡기를 끊으며 죽어갔다. 시인 구상은 친구 이중섭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중섭은 판잣집 골방에서도 그렸고, 부두에서 짐을 부리다 쉴 때도 그렸고, 캔버스나 스케치북이 없으니

합판이나 맨 종이, 담뱃갑에 그렸고, 물감과 붓이 없으니 연필이나 못으로 그렸고,

잘 곳과 먹을 것이 없어도 그렸고, 외로워도 슬퍼도 그렸다.”

은지화를 비롯해 부산, 제주도 피란시기의 작품, 가족을 그리워하며 남긴 수많은 편지와 가족 그림을 

남긴 이중섭,

사랑과 행복, 힘과 희망, 이데아를 그렸지만 현실의 이중섭은 영양실조와 간염에 시달리다

홀로 숨을 거둔 뒤, 사흘 뒤에야 친구들에게 발견될 만큼 쓸쓸한 인생을 보냈다.

 

화가지만 제대로 된 유화가 없을 정도로 가난했던 이중섭. 그래서 장판지, 은박지 등 닥치는 대로 그렸고

 이런 궁핍함 속에서 은지화가 탄생하게 되었다. 담뱃갑 속 은지에 송곳이나 나무 펜으로 새긴 은지화는 세계에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독창적 기법으로, 20세기 한국화가 작품 중 유일하게 뉴욕현대미술관(MOMA)에 3점이 소장돼 있다.

 재료 살 돈이 없어서 그린 은종이그림이 미술 재료의 확장이라는 고유성을 인정받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