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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생게사부르 2019. 7. 22. 13:25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 56세) 오스트리아 빈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 1

캔버스, 유화. 금 은 장식(1907. 뉴욕 노이에 갤러리)

 

 

 

 

 

 

이 초상화의 조카 마리아 알트만(유대인)과 오스트리아 정부와의 소송으로 유명하지요.

Lady(Woman ?)-in-Gold

 실화를 영화로 만든 것 얼핏 봤는데, 제대로 못 봐서...언젠가 한번 맘 먹고 집중해서 봐야 할 거 같아요

 

영화에 집중하지 못했다는 건.. 먹을 준비, 빨래 기타 생활상의 문제로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는 ...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기로는 이런 수식어가 제일 빠른가요?

"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 1억 3500만 $ , 1500억원)"

물론 이미 10년도 더 된 얘기라 이미 갱신되었는지 모르지만요

 

정작 그림의 주인공은 정략결혼을 한 이후 이 둘은 태어나자 마자 죽 하나는 세살을 못 채우고 죽고

본인도 마흔 세살 젊은 나이에 죽었답니다.

 

클림트 대단한 후원자였는데...그래도 이렇게 그림 속에 남았네요.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 2

 

 

 

프리차 리들러(Frau Fritza Riedler) 부인

1906. 오스트리아 미술관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는

 

 

빈 외곽 바움가르텐에서 금속세공사 아버지와 오페라 가수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어요

 

1862년, 오스트리아 빈 근교의 바움가르텐에서 보헤미아 출신의 귀금속 세공사이자 조각가의
아버지로 부터 수공예적인 기술을, 오페라 가수였던 어머니로 부터 또 다른 예술가적 기질을 물려받게 됩니다

 

14세가 되던 1876년 <빈 응용미술학교>에서 회화와 장식교육을 받게 되고 1883년 졸업 후, 그의 동생 "에른스트"와 동료인

 "프란츠 마치"와 함께 공공건물에 벽화를 그리는 일을 시작한 뒤
1880년대 말 무렵부터, 국립극장과 미술사 박물관에 장식화를 그리기 시작하면서 <건축장식미술>의 대가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고 합니다

 

7남매 중 둘째로 태어난 구스타프는 유년 시절, 비교적 다복했었다고 하는데, 이후 경제위기의 여파로 형편이

어려워졌다는 얘기

 1982년 아버지와 동생의 사망에 충격을 크게 받고 1895년 까지 작품활동을 중단했다는 얘기

그 외 클림트의 어린 시절이나 개인적인 생애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고 하네요
생전,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꽤 유명했던 화가이기는 하지만, 
단 한번도 그의 그림에 대한 설명이나 인터뷰를 하지 않았기도 했고, 자녀는 10명 가까이 되지만

평생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생을 마감했기에 인간, klimt에 대한 얘기를 들려줄 만한 후손이 없다고도 합니다

 

20대부터 이미 그림천재로 인정 받았고, 빈 상류층의 부인 초상화를 많이 그렸습니다

에로티시즘을 강렬한 상징으로 역동적으로 표현한 화가라는 평을 받는데 그 방식이 독보적입니다.

보통 금, 은을 사용하면 그림의 대상이 죽어 버린다는데 인물 주변의 그림자를 생략하는 평면적인 구성을

사용하여 잘 살려 내었다네요

 

화려한 장식들로 인물을 에워싸서 건강하고 육감적으로 피부를 두드러지게 하는,

화려한 색과 무늬를 뚫고 인간의 관능을 살아나게 하는 탁월한 실력을 지녔다네요

물론 어려서부터 몸에 밴 금은 세공을 다루는 역량이 그 기초가 되었겠지요

 

관능를 표현하되 절제되고 감추어진 표현에 주목하면서 감상해야 하나봅니다.

이를 테면 인간신체의 아주 작은 부분 손 모양, 얼굴표정 입술, 목 부위를 세밀하게 묘사해서 극적 효과를 내요

  

시든 그림이든 음악이든 그 주체는 사람이기에 어떤 부모에게서 어떤 유전자를 물려받고 어떤 영향을 받았는가는
그 사람의 예술세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모티브가 됩니다
예술은 어느정도 전문적인 공부를 하고나면 테크닉을 넘어서 그의 정신세계가 어떠하느냐에 따라
그만의 독특한 개성을 확보하는 영역이기 때문일것입니다

건축가 가우디보다 10년 후에 태어나 8년 먼저 죽었지만 시대적 배경이 비슷했던 유럽에서 활동했네요

영역이 달랐지만 이미 20대에 그 재능들을 인정받은 천재들임에 틀림이 없으나 클림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기에
시대가 따라주지를 못해서 앞서가는 천재의 고독을 맛 보았던 예술가인듯 합니다

 

 

1894년 빈 대학 대강당에 철학, 의학, 법학을 상징하는 세점의 천장 장식화에 공을 들였는데

선정성, 상징적 표현 염세주의적이라며 반감을 일으켜 거절당하는 좌절을 맛보게 되거든요

 

 

 

 

kiss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공존하는

 

 

 

 

유디트(judith)

 

유디트(judith) 1의 얼굴모델은 역시 블로흐 바우어네요.

손에 들고 있는 잘린 남자의 목...팜므파탈 주제로 다시 한번 포스팅 하고 싶고...

 

 

성적인 욕구를 표현하는 것이 금기시되었던 시대

 실제 난봉꾼에 가까울 정도로 여성모델들과 탐닉하다시피 생활했으니

남성으로서는 결코 만족하게 알수 없었던 인간의 반쪽인 ' 여성'에 대해 평생 탐구한 듯 한데

결혼을 한번도 하지 않았으니...' 육신'과 ' 정신'을 분리한 사랑이랄까

 

 

 

 

3 ages- of woman

 

 

 

hope 2

 

 

death- life

 

 

 

에밀리와 클림트

 

먼저 죽은 동생의 처제, 사돈인셈이지요

동양적인 윤리나 족보 개념이랑 좀 다르겠지만... 또 비슷한 점도 있을터여서

육체적 사랑이 배제된 반쪽의 사랑이지만 서로 ' 영혼'의 교감이 대단한 것 같습니다

 

일단 인연이 시작되고 난 이후 평생의 정신적 동반자였던 셈이고 클림트의 죽음을 지킨 여인

클림트가 한번 구애를 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만...사랑 이상의 대단히 완성된 인간관계 같습니다

 

 

 

 

에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