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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앞서 살았던 여성, 화가 나혜석

생게사부르 2018. 6. 3. 20:07

시대를 앞서 살았던 여성, 화가 나혜석

 

 

자화상

 

 

 

 

삶을 향한 여정에서 떼어놓는 발걸음이 영혼과 보조를 맞추어 세상과 조화롭게 사는 것은 얼마나 축복인가?

 

그러나 어느 시대, 어느 세상에서나 남들보다 앞선 생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남들이 가는 길을 아무 갈등 없이 얌전히 따라가기에 인간은 인간의 숫자만큼 생각이 다 다르다.

주체적인 삶을 살려고 하면할수록 자유의지가 강하면 강할수록 세상과 불화하며 남이 가지 않는

힘들고 어려운 길을 먼저 선택해서 갔던 사람들,

 

남이 다녀서 닦아 놓은 길이 아닌 경우 길 끝이 어떤 곳에 다다를지 알 수가 없어 불안하고 두렵다.

목적지에 가 닿을 것인가? 벼랑 끝에 나가 설 것인가?

우거진 잡목가지를 쳐 나가면서, 가시에 찔리고 발부리가 걸려 넘어지면서 헤쳐나가는 길,

물론 그렇게 누군가 먼저 헤쳐 지나가고 나면 그 다음 사람들은 좀 더 쉽게 두려움 없이 나아갈 수 있고

조금 더 지나면 으레 사람이 다니는 쉬운 길이 되곤 한다.

애초에 없던 곳에 길이 만들어 졌다는 사실 같은 건 까맣게 모르고 말이다.

 

천재나 선각자는 어느 시대나 나타나고 사회적으로 참으로 필요한 존재감 있는 삶이지만 개인적인 삶으로

 본다면 감내해야 할 고통의 강도가 만만치 않아서 참으로 힘든 삶을 살거나 중간에 꺾여 요절하거나 단명하기도 한다.

 

고흐나 까미유 끌로델의 삶, 순수한 예술혼으로 열정이 넘쳐 세상과 불화하는 삶을 살았던

이들의 고달픈 생애는 동서양을 막론하여 공통적이다

 

이전 시대에는 남녀의 삶이 동등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여성선각자나 지식인들은 남성에 비해 훨씬 더 힘든 삶을 살았다는 점을 인정하고 들어가야 할 것이다.

 

20세기 초반 경제적 정치적 변화와 함께 급진적으로 정신문화의 변화를 겪었던 한반도,

특히나 여성들에게 있어서는 그 혼란의 정도는 더욱 큰 것이었다.

 

변화의 한 시점인 1920년대,

 이전의 유교적 폐습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여성,

 '新여성'이라고 부르는 일군의 지식인 여성군이 나타났다.

 

신여성들은 구습 속에서 차별을 받던 자신들의 삶을 해방시키고 싶어했고 자신들 스스로가 구습을

타파하는 삶을 현실에서 살아내고자 했다.

 

자신이 습득한 새로운 사상을 실제 자신의 삶에서 실천하면서 살게 될 경우 나타나게 될 부작용이나 스스로에게

미칠 해악에 대한 충분한 검토없이 용감하게 자신의 삶의 열정을 불태운 이들 가운데 일부는 결과적으로

자신의 삶이 모험을 넘어 실험용이 되어버리기도 했다.

 

그 중에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 여류 화가였던 '나혜석'(1896-1948)의 삶은 근대 신여성으로서의 용감한

도전이었으나 불행하게 마감한 선각자의 삶의여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금강산

 

 

 

선죽교

 

 

 

캉캉

 

 

 

등을 보인 나부

 

 

녀는 수원의 부유한 개명관료의 딸로 태어나 우리나라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일본 도쿄 여자미술학교에서

유화를 공부한 신여성의 대명사였다.

 

 그 당시 어떤 한국여성도 비견 할수 없을 정도로 많은 혜택을 받고 누리면서 자라난 여성이었으며 그것에 대한 자각도 컸다.

그러기에 그녀의 삶은 족적자체가 여성들의 가장 앞자리에 설수 밖에 없었던 새로운 여성상의 모델이 될수 밖에 없었다.

 

그림에서 뿐만 아니라 문필분야에까지 폭넓게 활동하며 새 시대의 신여성이 나아갈 바를 열렬히 부르짖었고,

결혼 당시 남편에게 혼인 각서를 쓰게 하는 등의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도잔도 서슴치 않았다.

 

그런 한편 3.1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루고 무정부주의 단체인 의혈단의 후견인이기도 하는 등

시대가 요구하는 선각자로서의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결혼식 사진

 

 

그러나 모순되게도 정작 그녀의 남편은 한국인이면서 일본 정부로부터 촉망받는 외교관이었고,

열렬한 '이광수'의 신봉자이기도 하였다.

 

나혜석의 삶은 1927년을 전후하여 일대 전환기를 맞이하는데 남편 김우영과 함께 유럽순방을 떠나게 된 것이다.

  이들 부부는 1년 8개월 동안 러시아, 프랑스, 스위스, 독일, 이태리, 미국 등 열다섯 나라를 여행했다.

여성으로서는 최초의 서구 여행이었고 그 기간동안 나혜석은 파리에 수개월 간 혼자 머물며 그림을 공부했다고 한다.

 

 1927년이면 파리는 전 세계 예술인들이 모여들어 예술의 황금기를 구가하던 시기로 초현실주의가 꽃피고,

 피카소와 마티스와 헤밍웨이와 제임스 조이스가 있었던 바로 그 시절에 나혜석이 파리에 있었던 것이다.

 

 생각만해도 가슴 뛰는 일이다. 외교관 신분으로 방문한 유럽에서 받은 최고의 대우는 그녀를 풍요로운 유럽과

 유럽 사교계의 자유연애 분위기에 심취하게 했다.

 

그녀는 파리에서 사랑에 빠졌다.

 

남편과 떨어져 파리에 머무는 동안 '최린'을 만났고 이미 서구의 자유로운 연애 사상에

심취해있던 나혜석은 아무런 주저없이 최린과의 연애에 뛰어 들었던 것이다. 

 

파리에서의 나혜석

 

 

나혜석의 외도는 유럽에서는 사랑을 택한 용감한 선택으로 보여졌을지 모르지만 당시 한국사회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일탈이었다. 나혜석에 열광하던 사람들마저도 그녀의 이런 일탈에는 등을 돌렸다.

 

기혼 여성의 자유연애, 불륜이었다.

' 왕관을 쓰는 자 왕관의 무게를 누견뎌 한다고 했던가'

당시로서는 최고 상류층의 생활에 진입했으나 ' 그들만의 리그' 에서 따라야 할 조신한 여성으로서의 관습을 따르지

은 댓가로 그녀는 1931년 남편에게서 이혼을 당하게 된다.

 

 이후 나혜석은 남녀에게 다르게 적용되는 ‘자유연애나 이혼에 대한 부당함 때문에 1934년 이혼고백서를 발표하고

최린에게 보상금을 요구하는 제소장을 냈다. 그러나 이것은 나혜석을 궁지에서 꺼내주기는커녕 쉬쉬하면서

소문으로만 돌던 그녀의 외도를 스스로 인정한 꼴이 되어 나혜석은 사회적으로 용서받지 못하게 된다.

 

그녀의 인생을 바꾼 최린(1878∼?) 그녀가 신봉한 이광수 (1892~1950)

 

이후 그녀의 삶은 비참했다. 남편 김우영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녀들에 대한 일체의 권리도 박탈당해 자녀들과

만나는 일조차 허락되지 않았으며 그녀의 도덕성에 찍힌 붉은 낙인은 그녀가 소유한 빛나는 재능과 지성을 탕진하게

만들었고 한번 잘못 들어선 진창 속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그대로 좌절하게 만든다.

 

20세기 초반 한국의 지식인 사회는 혼돈 그 자체였고 그 중에서도 여성에 대한 인식은 어떤 기준도 없이

여성개인과 사회분위기에 고스란히 맡겨졌기에

 

환경적으로 타고난 여건으로 인해 한때 한반도 여성의 가장 앞자리에 서서 나아가던 나혜석.

그녀의 선각자적인 삶은 세상의 몰이해와 스스로의 한계로 인해 겨울날 채 피지도 못하고 얼어 죽은 꽃이 되었다.

 

 

이혼 당한 후 온갖 어려움을 겪을 때, 자유와 불륜의 장소였던 파리를 꿈꾸며 쓴 글

 

' 가자 파리로 살너 가지 말고 죽으러 가자. 나를 죽인 곳은 파리다. 나를 정말 여성으로 만들어 준 곳도 파리다.

나는 파리 가 죽으랸다. 차질 것도 맛날 것도 엇을 것도 업다. 도라올 것도 없다. 영구히 가자.

과거와 현재가 공인 나는 미래로 나가자. (삼천리 1935년 2월) '

 

 이혼 후에도 한동안은 미술 작업과 집필 활동을 했지만 결국 불륜의 상대와 가족에게조차 버림 받고 만다.

 

 그녀는 중이 되겠다고 수덕사 주위를 맴돌기도 했지만

질병과 가난으로 연고 없이 떠돌다 5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나혜석 작품들

 

만주 봉천공원

 

파리풍경

 

 

 

화령전 작약

 

 

 

인천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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