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권혁웅 봄밤, 문성해 봄밤

생게사부르 2017. 4. 10. 09:24

권혁웅


봄밤


전봇대에 윗옷 걸어두고 발치에 양말 벗어두고
천변 벤치에 누워 코를 고는 취객
현세와 통하는 스위치를 화끈하게 내려버린
저 캄캄함 혹은 편안함
그는 자신을 마셔버린 것이다
무슨 맛이었을까?
아니 그는 자신을 저기 토해 놓은거다
이번엔 무슨 맛이었을까?
먹고 마시고 토하는 동안 그는 그냥 긴 관이다
그가 전 생애를 걸고
이쪽 저쪽으로 몰려다니는 동안
침대와 옷걸이를 들고 집이 그를 마중나왔다
지갑은 누군가가 가져간 지 오래,
현세로 돌아갈 패스포트를 잃어버렸으므로
그는 평안한 수평이 되어 있다
다시 직립 인간이 되지는 않겠다는 듯이
부장 앞에서 목이 굽은 인간으로
다시 진화하지 않겠다는 듯이
봄밤이 거느린 슬하,
어리둥절한 꽃잎 하나가 그를 덮는다
이불처럼
부의봉투처럼


문성해


봄밤


빈집 앞에서 쓴다
젖빛 할로겐 등을 켜 단 목련에 대하여,
창살 박힌 담장에 하얗게 질려 있다고,
엉큼한 달빛이 꽃잎 벌리려 애쓴다고,
나뭇가지를 친친 감은 가로등이 지글지글 끓는다고,
촛농처럼 떨어진 꽃잎들 창살에 꽂힌다고,

봉오리들 아우성치며 위로 위로 도망친다고,
추억의 등불 켜 다는 마음 약한 꽃들이
나 같다고

 

 

*     *     *

 

 

이미 40전 전에 시인이 시에서 말하는 에피소드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술이 취한 채로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고 어떻게 집까지는 겨우 도착했는데

그만 대문앞에서 그 끈이 풀려 얌전하게 옷 벗어 걸어놓고 잤다는...

그때만 해도 아가씨고 그제나 지금이나 술을 못 마시는 저는 ' 에이 설마 과장된 얘기겠지 '했습니다.

 

이제는 충분히 그럴수 있다고 믿습니다.

버스를 탔는데 바닥이 일어나 이마를 쳤다든지

골목길이 좁아서 이리 부딪치고 저리 부딪치며 ' 누가 길을 이 따위로 만들어 놨어' 하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는데 뒷날 골목길은 넓기만 하더라는 얘기,

전봇대를 붙잡고 시비걸며 싸우고 있는 얘기

술은 '도깨비 국물'이라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겠지요.

술 마신 사람과는 절대 시비를 붙지 말아야한다는 나름의 신조까지 생겼고요 

 

시인은 ' 현세로 통하는 스위치를 화끈하게 내려 버린,

현세로 돌아갈 패스포트마저 잃어버리고 평안한 수평'이 된

' 자신을 마셔버린, 먹고 마시고 토하는 긴 관'이라네요

편안하게 자신을 내려 놓기도 했지만 캄캄한...

 

 

문성해 시인은 ,
' 창살 박힌 담장에 하얗게 질려 있는, 젖빛 할로겐 등을 켜 단 목련' 에 대하여 쓰고 있고요

어떻든 봄밤은 꼭 시인이 아니더라도 다른 계절의 밤과는 또 른 취흥을 불러 일으키나 봅니다.

젖빛 할로겐이든, 휘황한 네온사인이든 불빛을 받고 있는 꽃봉오리를 보는 것만으로도 술 안주감으로

이미 만족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