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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에서 반 나절, 관룡사부터

생게사부르 2017. 2. 9. 00:31

창녕에서 반 나절, 관룡사부터

 

무단히 창녕으로 날랐습니다 .

솔직히 무의식 속에 창녕을 한 바퀴 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은연중 자리잡고 있었을 것입니다.

화왕산은 서너번 올랐던 기억이 있고, 가을 억새밭에서 찍은 사진도 남아 있습니다.

화왕산 산행은 꽤 인기가 있었고 특히, 가을의 억새는 장관이어서 인파가 넘쳐났지만

2009년, 축제행사 중에 참사라 할 정도의 화재가 일어나 사상자가 발생한 이후 다시 가 보지는 못했네요.

 

학생들 체험학습 과정에서 창녕박물관은 관람 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요즘은 전담 학예사들이 있어 설명이나 해설을 곁들여 주지만 그 이전에는 박물관 괌람시

좀 눈치가 있고 학구적인 아이들은 하나라도 더 얻어 듣겠다고 역사샘 주변에 모여 들곤 했습니다.

 

요즘은 그런식으로 의욕을 보이는 아이들이 별로없고 그럴 필요도 없는 것 같지만요.

 

다수가 둘러 앉아 혹은 모여서 하는 학습보다 지 각각 필요한 내용을 휴대폰으로 검색하는 학습이 더 흔하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학습하는 장소가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어서 휴대폰이 터지는 곳이면 어디서나 가능하기도 하고요

 

그건 우리 성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그 利機를 이용하여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나 생활방식을 변하게 합니다

너무 맹신을 해서 그런 흐름이 전부라 생각하면 안 되겠지만 부작용이 없는 한

그런 흐름에 적응하고 이용하면 될 것입니다.

 

오늘은 관룡사를 비록하여 창녕 읍내에 있는 몇 군데 문화재를 둘러 보았는데

나 역시, 도로이용부터 목적지 위치, 거리 이동시간 등에서 T-map을 여러차례 이용했고,

인터넷 정보검색 통해 모르던 사실들, 지식들을 찾아 알게 되었습니다

 

 

 

 

 

최근 최순실 사건으로 인해 다시 재조명되는 인물로 러시아 마지막 황제 니꼴라이와 그 왕후가 불러들여 국정을 농락한

 라스푸틴, 고려 말 공민왕 때 등용되었던 신돈, 조선 명성왕후 시기 신령군등이 자주 언급되었습니다.

 

나라가 망해 갈 즈음, 무능하고 부도덕한 정권에 변칙적으로 기용되어 힘을 가지게되고 그 힘을

부당하게 행사함으로써 그 정권의 멸망을 가속화 시킨 인물들,

 

그나마 신돈은 고려말 사회적 모순의 중심에 있던 기득권 세력인

권문세족들을 누르고 억압받던 백성들을 위해 바람직한 방향의 개혁을  도모 하려했 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부분도 있다는 것이 다른 인물들과의 차이라면 차이점일 것이겠지요

 

관룡사 들어가는 입구에 서 있던 팻말에 신돈에 관한 이야기가 언급되어 있었습니다.

신돈의 어머니는 지금은 터만 남은 이 곳 옥천사 노비였고 신돈 역시 여기서 태어나고 자랐다고 기록되어 있네요.

아버지 얘기는 언급이 없는데 내가 알기론 떠돌이 소금장수였다고 알고 있습니다.

 

요승이나 괴승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땡중이든 뭐든 신돈이 ' 중(僧)'으로 불리기까지

미천한 신분에서 왕의 신임을 받고 한 나라의 정책을 좌지우지 할 정도의 세도를 부리다가

결국 피살 당하게 되는 한 생애의 시작이 이 곳 창녕, 여기 있던 절이었다니 느낌이 새삼스러웠습니다.

 

신돈이 공민왕의 마음을 사로 잡는 부분과 최태민이 박근혜 마음을 사로잡는 부분이 거의 비슷해서

꼭 평행이론 이런 것 아니라도 인간의 심리는 시대를 건너뛰어 참으로 보편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육여사가 꿈에 나타나 곁에서 도와주라' 했다는 얘기...

 

육영수여사가 졸지에 돌아가신 이후 최태민이 위로 편지를 썼고 박근혜가 만나게 되면서 두 사람 인연이

시작되었고 대를 이어 내려오면서 결국 오늘에 이르러 세상을 시끄럽게 하고 있으니

 

당시 고려는 원의 '부마(사위)국'이었지만 원의 쇠퇴기여서 공민왕은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했습니다

그 정책은 크게 두가지 방향에서 이루어졌는데

원나라가 다스리고 있던 땅을 회복하고, 몽고 풍속을 금하면서 당시 원에 기대어 세력을 누리고 있던

친원(부원)세력의 힘을 약화시키고자 하는 자주성회복이 그 하나이고

다른 한 방향은 당시 부의 원천인 토지(대농장)를 다 차지하고 있으면서 세금을 내지 않던 권문세족들의

힘을 약화 시키려 토지개혁을 실시하려고 한 일입니다.

 

' 전민변정도감'이라고 학창시절 역사공부하면서 들었을 텐데요.

권문세족들이 불법으로 차지하고 있던 토지를 개혁하고 노비를 평민으로 만들어 기득권을 약화 시키면서

백성들의 힘을 키워 국가재정을 늘리려 했고 그 일을 신돈에게 맡겼던 셈입니다

 

요즘으로 비유하면 재벌들 불법 포탈 못하게 하고 중산층 키워 나라기초를 튼튼히 하겠다는 것이니

공민왕과 신돈의 개혁이 성공 했더라면 고려가 그렇게 금방 무너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떻든 원의 공주였던 왕후와는 금슬이 좋았던지라 마흔이 넘어 출산을 하다가 노국대장공주 죽자,

슬픔을 못이겨 정치에도 뜻이 없어지고 무력해 지는 중에

신돈이' 회혼술'로 죽은 사람의 혼을 불러 오는 재주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가까이 두게되는 게 후에 파국(공민왕과 신돈이 피살당하는)을 불러오는 시초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든 저렇든 관룡사 입구에서 부터 얘기꺼리가 널려 있었네요.

하긴 우리국토 어디를 가든 온 산하가 다 우리 조상들 옛 얘기를 간직하고 습니다

좋은 얘기든 나쁜 얘기든, 그건 그대로 '우리의 역사'이니

인간이 살아가는데 ' 文,史, 哲 '이 인문교양이 될수 밖에 없다는 반증이건만

 

오늘 기사에는 남자들은 理科가 아니면 취업을 할 수 없고, 결혼도 할수 없다는 슬픈 얘기가 버젓히

실려 있는 것 또한 현실입니다.

 

 

 

 

민속자료 제 6호 석장승

 

 


 

 

 

 

관룡사는 화왕산 군립공원 구룡산에 있는 고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의 본사인 통도사(通度寺)의 말사입니다. 
 
신라 8대사찰의 하나로, <사기 寺記〉에 의하면 349년에 창건되었다고 하지만 확실하지 않습니다.

또 전설에 의하면 원효대사가 제자 송파와 함께 이곳에서 100일기도를 드릴 때 오색채운이 영롱한 하늘을 향했으니

 화왕산으로부터 9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것이라 절 이름은 관룡사, 산 이름은 구룡산이라 했다고 합니다.

 

 583년(진평왕 5) 증법(證法)이 중창하고 748년(경덕왕 7) 추담(秋潭)이 중건하였으며

삼국통일 후 원효가 중국 승려 1,000명에게 <화엄경>을 설법하여 대도량(大道?)을 이루었답니다.

 

조선시대에 들어 1401년(태종 1) 대웅전을 중건했으나 임진왜란 때 대부분 당우(堂宇)가 소실되어,

1617년(광해군 9)에 영운(靈雲)이 재건하였고, 1704년(숙종 30) 가을 대홍수로 금당이 유실되어

1712년(숙종 38) 대웅전과 다른 당우들을 재건했으며 1749년(영조 25) 다시 부분적인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사찰 내에는 보물 제212호인 대웅전, 보물 제146호인 약사전, 보물 제295호인 용선대석조석가여래좌상,

 보물 제519호인 석불좌상,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1호인 3층석탑 등의 귀중한 문화재들이 있습니다.

 

 

 

 

 

 

 

 

 

 

 

 

일반적인 사찰이 대웅전, 삼성각, 명부전, 범종루가 기본이라면 관룡사는 응진전, 약사전까지 있어서

생각보다 넓위치도 반듯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특히,

  뒤로 펼쳐진 병풍바위가 절을 둘러싸고 있는 듯 해서 인상적이었습니다

 

 

 

 

 

 

 

 

 

 

 

' 한가지 소원은 꼭 들어준다'는 관룡사 :

 

 임진왜란을 겪으며 관룡사의 모든 건물이 불에 타 사라졌는데 오직 약사전만이 그 화를 면했다고 합니다.

이를 기이하게 여긴 '영운' 이라는 고승이 약사전에 영험한 기운이 있어 화를 피했다고 여기고 약사전을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들보 끝의 나무가 겹쳐진 곳에서 '永和5年己酉(영화5년기유, 349)' 라는 글자를 발견하였습니다.

 이때부터 관룡사에서 빌면 한가지 소원은 꼭 이루어진다는 설이 널리 퍼졌고,

( 저도 한 가지 한 가지 빌었습니다)

관룡사는 많은 이들이 수행하고 기도하는 영험한 수행지가 되었다네요.

 

제대로 갖추어진 절이 아니었더라도 위 연도가 절의 시작이었다고 보면 관룡사의 역사는 1700여 년이 되어

 이 땅의 불교 역사와 함께 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삼국의 불교 도입 시기는 고구려 372년 백제 384년 신라도 4C-5C에 들어왔을 것으로 추정되나

토착종교가 강해서 이차돈의 순교가 이루어진 후 6C 법흥왕(527년) 때 공인된 것으로 알려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