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양정자:기대, 미래의 남편

생게사부르 2015. 12. 9. 20:07

양정자

 

 

기대

공부도 신통찮은데
남에게 지기 싫어하고 참견 안 하는 데가 없어
친구들과 유난히 잘 다투는
입이 참새처럼 뾰족 튀어나온 박현주
아무리 야단쳐도 말다툼 그칠 날 없네
생각다 못해 1학기 성적표 가정통신란에
'마음이 너그럽고 이해심이 깊어
친구들과 유난히 사이가 좋습니다' 라고
은근히 정반대로 부추켜 주었더니
아니, 이게 웬일인가
2학기부터는 싸움 한번 안 하고
밀가루 반죽처럼 부드러워졌네
눈부신 꽃으로 보면 더욱 눈부신 꽃이 되고
하찮은 돌멩이로 보면 여지없이 돌멩이로 돼버리는
기대한 만큼보다 훨씬 더 이루는
무한 가능성의 놀라운 아이들



미래의 남편

지금 저렇게 누런 코 줄줄 흘리고
손톱 때 새까맣고
숙제도 준비물도 제대로 한번 챙겨본 적 없는
우리 반 칠칠이 준호
지금 어디선가 코 줄줄 흘리고
손톱 때 새까만 채 떠들썩 자라나고 있을
한 칠칠이 여학생 만나
그래도 사내꼭지라고
제 여자 쥐잡듯 잡도리하며 사랑도 해주면서
남편 구실 당당히 해나가겠지


가을 소녀들

학생들도 선생님들도 다 가 버린
꽃도 잎도 다 져버린
을씨년스런 11월 텅 빈 교정 한 구석에서
아직 사춘기에 이르지 못한 중 1짜리 계집애들이
늦게까지 고무줄을 하고 논다
"장난감 기차가 칙칙폭폭 떠나간다.
과자와 사탕을 싣고서....."
잔설처럼 깔린 황혼을 스산히 몰고 가는 찬바람에
펄럭이는 교복 치마 밑에서 통통히 여무는 종아리
계집아이들의 높고 쾌활한 웃음소리에
어둑신한 교정 한 구석이
꽃핀 것처럼 환하게 밝아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