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나희덕- 속리산에서, 대숲에 내리는 달빛, 흔들리는 것들

생게사부르 2015. 12. 7. 18:42

나희덕 2.

 

俗離山(속리산)에서


가파른 비탈만이
순결한 싸움터라고 여겨온 나에게
속리산은 순하디 순한 길을 열어 보였다
산다는 일은
더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라는 듯
평평한 길은 가도 가도 제자리 같았다
아직 높이에 대한 선망을 가진 나에게
세속을 벗어나도
세속의 습관은 남아 있는 나에게
산은 어깨를 낮추며 이렇게 속삭였다
산을 오르고 있지만
내가 넘는 건 정작 산이 아니라
산 속에 갇힌 시간일 거라고,
오히려 산 아래서 밥을 끓여 먹고 살던
그 하루하루가
더 가파른 고비였을 거라고,
속리산은
단숨에 오를 수도 있는 높이를
길게 길게 늘여서 내 앞에 펼쳐주었다


대숲에 내리는 달빛


대숲에 내리는 달빛
푸르디 푸른 마디마다
차 오르는 저 환희
눈물이라야 죄다 눈물 일수

없고
사랑일야 죄다 사랑 일수

없는
반짝이는 수천 수만개의
저것들이 진짜 적막이구나
지상의 등불마저 다 사라지고
어둠은 벌서 만조다
다시 시작해도 처음 같고
처음 시작해도 마지막 같은
누구의 간절 한 소망이냐
바람이 없어도 혼자 스러지고
혼자 일어서는 눈부신 저것

 

 

흔들리는 것들

 

 

저 가볍게 나는 하루살이에게

삶의 무게는 있어

마름 쑥풀 향기속으로

툭 튀어 오르는 메뚜기에게도

삶의 속도는 있어

코스모스 한 송이가 허리를 휘이청하며

온 몸으로 그 무게와 속도를 받아낸다

 

어느해 가을인들 온통

흔들리는 것 천지 아니었으랴
바람에 불려가는 저 잎새 끝에도

온기는 남아 있어 생명의 물기 한점 흐르고 있어

나는 낡은 담벼락이 되어 그 눈물을 받아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