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의사 가묘와 조마리아 여사
다시 3.1절 입니다.
안중근 의사 의거가 일어나고 순국을 하신지100년이 넘었고(107년), 3.1 운동의 함성이 메아리 쳤던 날로부터
97년, 100년 가까이 되었습니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 의사는 현장에서 체포됐습니다.
이후 모두 여섯 차례의 재판 끝에 이듬해 2월 14일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이로부터 다시 40여일 뒤인 3월 26일, 의거일로부터 1백52일 되던 날
안 의사는 교수형으로 여순 감옥에서 순국하였습니다.
안중근 의사 마지막 집필 하시던 책상
안 의사의 유해는 감옥 뒤편 공동묘지에 매장됐는데, 100년을 넘긴 오늘 날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안 의사의
유해 봉환은커녕 유해를 찾지도 못했습니다. 젊은 나이에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건만
'조국 광복이 이루어지면 자신의 유해를 고국으로 옮겨 묻어달라'는 안의사의 유언마저 지키지 못하는 못난
후손들, 참으로 부끄럽고 죄스러운 일입니다.
서울 용산구에 '효창' 공원이 있습니다.
효창운동장이 시작되는 입구에서 오른쪽 언덕배기에 백범 김구 선생의 묘소가 있습니다.
백범의 묘소 오른편 아랫녁에는 이른바 ‘3의사(義士)묘역’이 있습니다. 3의사는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를 말합니다.
이봉창, 윤봉길 의사는 잘 아시는 분일터이니 백의사 설명만 덧붙입니다.
백정기 의사는 1933년 3월 중국 상하이에서 일본군 요인을 암살하려다 밀고로 체포돼 일본 감옥에서 순국하셨습니다.
효창공원 3의사 묘역
1945년 11월 중국에서 환국한 백범 김구 선생이 제일 먼저 한 일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가의
유골을 찾아 국내로 봉환하는 것이었습니다. 백범은 우선 일본으로 사람을 보내 3의사의 유해발굴에 나섰습니다.
이듬해 6월 3의사의 유해가 수습돼 부산에 도착할 무렵 백범은 몸소 부산까지 내려가서 현지에서 추도식을 지낸 후
3의사의 유해를 맞았습니다.
서울로 올라와 3의사의 유해 안장 장소를 물색하던 백범은 유서깊은 효창원 내에 묘터를 정한 후
3의사의 유골을 안장하였습니다. 그리고는 3의사 묘단에 친필로
‘遺芳百世(꽃다운 향기여 영원하라!)’라는 휘호를 남겼습니다.
1948년에는 중국 중경에서 독립운동 중에 순국한 이동녕ㆍ차리석 선생의 유골을 중국에서 모셔와 안장하였고,
같은 해 국내에서 서거한 조성환 선생을 두 분 곁에 안장하였습니다.
위에서 소개한 의사 세 분의 유해가 안장돼 있는 ‘3의사 묘역'의 묘소는 4기이며 그 중 제일 왼쪽,
즉 윗자리의 묘소에는 묘비가 없습니다.
묘비가 없는 이런 묘를 흔히 가묘(假墓), 혹은 허묘(虛墓)라고 하는데,
대개 나중에 묘를 쓰기 위해 임시로 봉분을 만들어 두는 경우를 말합니다.
제일 왼쪽 묘비가 없는 묘가 안중근 의사의 '가묘'입니다. 백범은 3의사의 묘소를 만들면서
미처 유해를 찾지는 못했지만 언젠가는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봉환해 올 것으로 믿고 가묘를 만들어 둔 것입니다.
백범의 비서를 지낸 선우 진 선생이 펴낸 <백범 선생과 함께 한 나날들>(푸른역사 펴냄)에 따르면,
1948년 남북협상 차 방북했을 때 백범이 북한 김일성에게 안 의사 유해 천장(遷葬, 이장) 문제에 대해 협조를 구했는데
이 때 김일성은 여순(旅順)이 소련의 계엄 하에 있기 때문에 곤란하다며
'통일이 되면 모셔 내올 텐데 뭘 그리 서두르십니까' 했답니다.
환국 후 백범은 어렵고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3의사와 안 의사의 가묘가 있는 이곳 묘역을 찾아
고인들에게 지혜를 구했다고 합니다.
효창공원 3의사 묘역 참배하시는 백범선생
그간 남한은 물론 북한도 안 의사의 유해발굴을 위해 나름으로는 노력을 한 것으로 압니다만,
남북한 모두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는 못하고 있으며 세월이 너무 많이 흘러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기가 점차 힘들어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친일 청산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친일파에 의한 정권의 연장이 가져 온 또 하나의 민족사적 비긱입니다.
보통 위대한 인물뒤에는 위대한 어머니가 계시기 마련입니다.
안중근의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 역시 대장부였고 여성독립 운동가였습니다만 역시 유해가 묻힌 곳을
알지 못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항일운동의 어머니인 조마리아 여사는 배천 조씨로, 1862년에 태어나 황해도 해주부 수양산 아래 살던
순흥 안씨 집안의 태훈과 혼인하였습니다.
그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이 바로 우리 민족의 영웅 안중근입니다.
남편 안태훈은 여러 형제 중 재주와 지혜가 뛰어나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개화파에 연루되어
신천군 청계동으로 이주하였습니다.
조마리아는 6세 된 안중근을 데리고 청계동에서 살림을 하고 가족의 대소사를 도맡으며
가정을 건사하였습니다.
1909년 안중근에 의해 이토가 사살된 이후, 조마리아는 평양으로 가서 변호사로서 명성과
애국심이 강한 안병찬에게 변호를 부탁하였습니다.
당시 이를 두고 조마리아를 조사한 일제의 순사와 헌병들에게 그녀는 태연한 모습으로
응대하였다고 합니다.
1910년 일제에 의해 사형이 언도되자 안중근은 항소를 포기하였습니다.
본능적으로 살고 싶어하는 생명에 대한 본성을 저버리고 대의를 택한 데에는 어머니의 영향이
적지 않았습니다.
사형언도 소식을 들은 조마리아는 아들 정근과 공근 형제 편에 간결하면서도 단호한
편지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전언으로만 알려져 있을 뿐, 안타깝게도 그 편지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자식이 살기를 그 누구보다도 간절히 바랐을 어머니 조마리아.
대의를 위해 죽고,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듯한 인상을 주지 말고 죽어라.
그렇게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라고 이야기하는 이 강한 어머니,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었습니다.
아들을 사랑했기에 그 아들이 사랑한 조국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것을 수용한 어머니
모친의 전언을 받은 안중근 의사의 심경은 어떠하였을지 순결했던 순국 모습에서 우리는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
[출처] 조 마리아 여사|작성자 만사무기
조마리아 여사의 편지를 인용해 봅니다.
그 상황이나 심경을 문학적으로 표현해 본 것이지 역사적인 근거가 남아 있지 않다고 합니다만
링크된 자료를 보면 글쎄요???
3월 학기제라 3.1절은 우리에게 개학 준비하는 날, 새학기 시작 전 하루 휴일의 의미가 강했습니다만 그래도 올해는 주변에서 " (윤)동주" 나 "귀향" 영화를 보는 분위기여서 올 3.1절은 덜 섭섭합니다. ' 암살' 영화가' 여성항일 독립투사 '남자현'을 부각 시켰듯이 문화예술의 힘이 정치를 뛰어 넘는 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역사는 언젠가는 진실을 밝힌다는 믿음 또한 확인하게 됩니다. 우리의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에 자신의 삶을 바치는 분들 존경합니다. 임종국 선생님 정운현 선생님의 노력이 헛되지 않기를 바라며 영 더 불가능한 일이 되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안 의사와 조마리아 여사의 유해를 찾아 하나 뿐인 목숨을 바쳐 찾고자 했던 독립된 조국, 그들이 사랑했던 모국의 땅에서 영면 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조 마리아 여사
안중근 의사 재판이 열렸던 관동 지방법원
친일 자료: 정운현의 보림재(임종국을 보배로 받드는 서재
정운현 선생의 연구와 자료가 독보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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