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파일명 서정시

생게사부르 2019. 2. 25. 09:45

파일명 서정시/ 나희덕


그들은 <서정시>라는 파일 속에 그를
가두었다
서정시마저 불온 한 것으로 믿으려
했기에

파일에는 가령 이런 것들이 들어
있었을 것이다

머리카락 한줌
손톱 몇 조각
한 쪽 귀퉁이가 헤진 손수건
체크무늬 재킷 한벌
낡은 가죽가방과 몇 권의 책
스푼과 포크
고치다 만 원고뭉치
은테 안경과 초록색 안경집
침묵 한병
숲에서 주워 온 나뭇잎 몇 개

붕대에 남은 체취는 유리병에
밀봉되고
그를 이루던 모든
것이 <서정시> 속에 들어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의 서정시들과 함께

그들은 이런 것조차 기록해 두었을
것이다

화단에 심은 알뿌리가 무엇인지
다른 나라에서 온 편지가 몇 통인지
숲에서 지빠귀와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옷 자락에 잠든 나방 한마리를 어떻게
바라 보았는지
하루에 물을 몇통이나 길었는지
재스민차를 누구와 마셨는지
도서관에서 어떤 책을 대출 받았는지
강의시간에 학생들과 어떤 말을
주고 받았는지
저물 무렵 오솔길을 걷다가 왜 걸음을
멈추었는지
국경을 넘으며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이 사랑의 나날 중에 대체 무엇이
불온하단 말인가

그들이 두려워 한 것은
그가 사람의 마음을 열 수 있는
말을 가졌다는 것
마음의 뿌리를 돌보며 살았다는 것
자물쇠 고치는 노역에도
시 쓰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는 것
파일명 <서정시>에서 풀려난
서정시들은 이제 햇빛을 받으며
고요히 반짝인다
그의 생애를 견뎌온 문장들 사이로
한 사람이
걸어 나온다, 맨발로, 그림자조차
걸치지 않고






'시로 여는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심同心/ 문성해  (0) 2019.03.03
황인숙 간발  (0) 2019.02.28
문인수 2월  (0) 2019.02.21
아득한 한 뼘 / 권대웅  (0) 2019.02.20
장독대가 있던 집/ 권대웅  (0) 2019.0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