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승유
아이를 낳았지 나 갖고는 부족할까봐에서
모자의 효과
친척집에 다녀와라
가족 중 하나가 그렇게 말해서 여자아이는 집을 나섰다
친척집에 간다는 건
페도라, 클로슈, 보닛, 그런 모자를 골라 쓰는 일 모자를 쓰고 걸어갈 때 모자 속은 아무도 모르고 모자 속을 생각하면 모자 속이 있는 것만 같다 긁적이며 생쥐가 태어나는 것만 같다 고모와 당고모와 대고모의 발바닥으로 가득한
그런 친척집이 있는 것만 같다
아이를 낳았지
나 갖고는 부족할까 봐
아이와
아이와
아이를
모자를 벗으면
등 뒤로 걸어 나오는 삼촌이 있고
높은 가지 끝에서 植物의 잠을 자다
너는 자주 들켰다*
사촌이 몸 안으로 들어오면 여긴 모르는 곳 구름과 이불 이불과 구름 잘못된 발음을 할 때처럼 죄책감이 들어 풀잎과 꽃잎 꽃잎과 풀잎 우린 그만큼 가까운가요? 풀숲의 기분으로 달려도 도착하게 되지 않는다 모자 속에서는 나쁜 냄새가 나는 것만 같다
짓이겨지는 풀잎과 짓이겨지는 꽃잎 중에 뭐가 더 진할까? 피는 물보다 진할까? 친척이 물 한 컵을 줄 때는 숨을 참으면 된다 맛도 안 나고 냄새도 안 난다
웃는 이가 된다
젖은 웃는 이가 된다
친척집에 간다는 건
페도라, 클로슈, 보닛, 그런 모자를 골라 쓰는 일 그런 모자 속으로 사라지는 일 모자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건 또 모자만 아는 일
* 이성복, 「핏줄이 번지듯이」중에서.
그러나 나는 설탕은 폭력적이라고 생각한다*
각설탕을 깨물어 먹고 싶었던 적이 있다
손가락에 침을 묻혀가며 읽었던
여자들의 가슴과 사내들의 아랫도리
이건 가학적인 포즈로 읽히기 십상이지
당신에겐 슬리퍼가 필요해요
릴랙스 릴랙스
어제 잡은 물고기, 라테, 빨간색이 사라진
귀여운 당신의 팬티
눈이 내린다
온몸을 던져 만들어내는 흰색들
티스푼으로 몇 날 며칠을 저어도
이상해요
달콤한 당신을 보면
나는 당신의 두 손을 만져보고 싶어져요
혼자 뒤뜰에서 벙그러지는
아름다운 꽃들처럼
속임수는 견딜 수 없게 아름다워요
내 치명적인 약점은 아름다움을 믿지 못한다는 거예요
에이프런을 두른 소녀가
밤새 당신의 창가에서 성냥을 그어대고 있어요
믿을 수 있겠어요?
당신이 우적우적 깨물어 먹고 있는
불빛 불빛들
* 롤랑 바르트,「카메라 루시다」중에서.
장소의 발생
노파가 담배 한 모금을 빨아들일 때
움푹하게 들어가는
허벅지에 감기는 치맛단의 기분으로
종종종
소녀들이 모여드는
녹는 게 겁나서 빨아먹지 못하는 사탕
아는 사람이 누워있을까 열지 못하는 방
이불은 내다 널면 되겠지만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아는 냄새면 어떡하지
망보는 벽을 세우고 더 들어가면 여긴 구멍 들어가 본 적 없어 나오는 방법을 모르는 백 년 동안의 소용돌이 단 하나의 점을 향해 휘몰아치는 정신을 쏙 빼놓으며 튀어나오는 쥐가 있고 꼬리를 잘라도 계속되는 몸 끝나지 않는 종아리 한 번도 멈춘 적 없는 머리카락 줄지 않는 피부 한 번은 다르게 살 수도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혼자서 들어갔다가 여럿이 되어 나온다
더 잘 사랑하기 위해서라면 그렇게 많은 몸이 왜 필요해 손등에 종아리에 불을 놓아 태우고 까맣게 모여 있는 그림자들
손을 맞바꾸는 악수처럼
벗었다는 기분 느낀 적 없는 데도 다 갈아입고 나오는
골목 입구에 앉은 노파가 담배 연기를 내뿜을 때
어쩐지 늙어서 나오는
소녀들이 있다
—시집『아이를 낳았지 나 갖고는 부족할까 봐』(2015)에서
임승유/ 1973년 충북 괴산 출생. 청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과 졸업. 2011년《문학과사회》신인상에 「계속 웃어라」외 4편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아이를 낳았지 나 갖고는 부족할까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