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한영희 수박이 아닌 것들에게

생게사부르 2018. 9. 10. 13:01

수박이 아닌 것들에게


한영희


여름이 아닌 것들을 좋아한다 그러니까 얼어 붙은 강, 누군가와 마주 잡은 손의
온기, 창문을 꼭꼭 닫아 놓고서 누운 밤, 쟁반 가득 귤껍질들이 말라가는 것을
좋아한다

여름은 창을 열고 나를 눅눅하게 만들기를 좋아한다 물이끼처럼 자꾸 방 안에
자라는 냄새들이, 귤 알갱이처럼 똑똑 씹히는 말들이 혓바닥에서 미끄러진다 곰이
그 위에 누워 있다

동물원 우리에 갇힌 곰이, 수박을 우걱우걱 먹어치우던 곰이 나를 쳐다본다 곰
에게서 침 범벅의 수박물이 떨어진다 여기가 동물원이 아니라 내 방이라는 것을
알아 갈 때쯤, 나는 혼자 남아 8월을 벗어난다

그러니까 수박이 아닌 것들을 좋아한다 차가운 방바닥에 눕는 것을 좋아한다 피
가 나도록 긁는 것을 좋아한다 좋아하는 것들이 땀띠처럼 늘어난다 그러니까 나는
이 여름을 죽도록 좋아한다

햇빛이 끈질기게 커튼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다 잎사귀의 뒷면과 그늘 사이를
벌려 놓는다 먹다 남긴 수벅 껍질에 초파리가 꼬인다 나는 손을 휘휘 저으며 그림자
를 내쫒는 중이다 쌓인 빨래더미 위에, 식은 밥그릇 위에 고요가 내려앉는다

그러나 의지와 상관 없이 종아리에 털들이 자라는 걸, 머리카락이 뺨에 들러붙
는 걸, 화분의 상추들이 맹렬히 죽어가는 걸 여름은 내내 지켜보고 있다 좋아한
다 좋아한다 쏟아지는 말을 주워 담을 수가 없다

 

 

 

 

 

 

*      *      *

 

 

여름이 아닌 것들을 좋아하는군요. 얼어 붙은 강, 마주잡은 손의 온기,

쟁반 가득 쌓인 귤껍질 말라가는 것... 겨울풍경입니만...

침 범벅의 수박물, 찹찹한 방바닥에 등을 대고 눕는 것 저도 좋아 합니다

화분의 상처들이 맹렬하게 죽어가는 여름을 죽도록 좋아하는 군요.

올해는 거의 모든 농작물,과일이 녹아 내렸을 것 같습니다만

 

아직 한낮 더위는 남았지만

위세 대단했던 여름이 이제 한 풀 꺾이는 분위기입니다.

' 여름' 이라는 계절을 올해처럼 ' 죽도록' 의식 해 본 건 처음인 것 같네요.

제 손으로 선풍기, 에어컨을 올해처럼 틀어보기도 처음이고요.

 

이른 아침 깨어나면

신선한 여름향이 코 끝을 간질이곤 했습니다. 시어머님이 식전부터 수박을 드시고 계시곤 하셨지요.

시원하고 달콤하기도 한 수박 맛이 향, 그래서 내게 여름아침은 수박냄새로 시작되곤 했었는데...

이젠 돌아가시고 안 계시네요

 

다른 가족들은 수박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올해는 수박 한 덩이 사지 않았습니다.

2만원대 가격도 가격이지만... 이전에도 먹는 사람이 없어서 한 덩이 사기는 부담되서

반 덩이 갈라 놓은 걸 사 와서 먹곤 했어요. 혼자서 한 두 조각 먹는데...그게 얼마나 오래 가는지

결국 끝에 버리게 되는 부분이 나와서... 먹는 일에 게으르고... 탄수화물 단백질 같은 기본 식품만

먹으니... 고급진 입맛은 못 되나 봅니다

 

사람들이 선풍기 에어컨 같은 기계들을 아무리 만들어 내도 역시 자연만큼 위대 한 게 없어서

요즘은 살만 합니다.

 

에어컨이나 선풍기로 시원한 바람을 대신한다는 게 한계가 있기 마련이어서

하루종일 노출되다 보면 눈도 따갑고 피부는 끈적하면서 냉냉하고 머리도 지끈거리고...

해가 갈 수록 더 심하면 심했지 덜 할것 같지 않아 고민입니다만...

 

일단은 푸른 가을 하늘, 선선한 가을 바람이 반갑습니다.

추석이 저만치 다가 와 있고, 가을만이 줄 수 있는 풍취를 물씬 즐기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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