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빈 상자들/ 장석주

생게사부르 2018. 6. 14. 08:29

빈 상자들/ 장석주


빈 상자들이 창고 안에 쌓여 있다

발톱도 없고 비늘도 없는

빈 상자들이 질서정연하게 쌓여 있다

빈 상자들이 무엇인가를 그 안에

채우기 위해 빈 채로 쌓여 있다
빈 상자 안이 공허로 가득 채워져 있는 동안

빈 상자는 다만 빈 상자로 불릴 것이다

빈 상자 속이 용이 담겨질

빈 상자는 무엇으로 불려야 하는

빈 상자 속에 생을 마감한 마르고 지친 한 육신이

눕혀질

빈 상자는 또 무엇으로 불려야 하는가

 

빈 상자 속에 무엇인가 채워지고

빈 상자는 어딘가로 이동한다

그것이 빈 상자의 기능이고

그것이 빈 상자의 운명이다

검은 기차를 타고

혹은 컨테이너선에 실려 이동할 때

빈 상자는 더 이상 빈 상자가 아니다

 

빈 상자 속에 무엇인가를 채우고

어디엔가로 옮겨 가는 것을 결정하는 것은

빈 상자들의 몫이 아니다

빈 상자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보이지 않는 손!

자살해버린 몇몇 빈 상자들을 빼놓고는

어떤 빈 상자도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했다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모든 것들은

빈 상자라고 불려도 좋은

 

중심을 비워둔 채

알수 없는 자신의 미래를 조용히 기다리는 빈 상

자들

저 어린 짐승처럼 순한 것들을

다만 빈 상자라고 불러도 좋은 것인가

나는 당신에게 말한다, 빈 상자들은 비어 있을 때만

빈 상자일 수 있다고

모든 빈 상자들의 뒤에는 언제나

빈 상자들의 운명을 움켜쥔 피 묻은 손이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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