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여행자 장석주

생게사부르 2018. 6. 15. 15:36

여행자/ 장석주



산성비 내려치네, 바람 부는 저녁
노점상들 모두 판을 거두고
광장에 맨드라미처럼 붉은 발목 내놓고 뛰놀던
아이들 제 집으로 돌아간 뒤
산성의 더러운 빗방울들만
알전구 불빛 아래로 몰리네

구름 밖 교회보다 더 먼곳에서 돌아온
이 세상에서 가장 늦게 도착한 여행자
옷깃에 아교처럼 달라붙어 펄럭이는 슬픔
등뒤에 캄캄한 문명을 그림자로 드리우고
박쥐우산을 펴들고 천천히 걸어가네

쓸쓸함보다 더 큰 힘이 어디 있으랴
추운 몸으로 너를 안는다
아궁이에 그해의 가장 아름다운 만다라 불꽃이 피
어날 때
눈빛에 광채 서린 사생아라도 하나 낳자

여자는 밤새도록 늑골 밑에서 자라는
잎사귀를 똑, 똑, 따내리며 슬픈 노래를 하네
손톱에 뜬 초승달마저 바랜 새벽
얼굴에 그린 눈썹 지우며 우네

나무들은 바람 속에서 아득히 흔들리고
들길 너머 진흙 세상 속으로 돌아가야 하네
고달픈 세월 건너느라 이끼 돋은 몸 속에서
여자는 새를 꺼내 건네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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