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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교수 별이 되다...

생게사부르 2016. 1. 16. 21:12

신영복 교수 타계

 

 

 

이 시대 흔하지 않은 또 한명의 스승 신영복 교수께서 희귀 피부암으로 75세로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이 시대의 대표적 지성인 ” (newsis)
'부석(浮石) 같던 큰 어른'.. (CBS노컷뉴스)

언론과 남은 이들의 표현이야 어떻든 성공이나 출세 등 현실적인 삶에 매몰되어 아귀다툼 하는 이 시대

물게 시대적 양심에 따라 지성인으로서의 삶을 실천적으로 보여 주셨던 분입니다.

 

피부암이라 하니 1968년 '통일혁명당 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20년 넘게 감옥생활을 하며 겪은 고초를 알고 있기에 혹 그 영향은 아닌지...암이란 누구나 내재하고 있지만 자신의 육신에서 제일 약한 부분에 먼저 파고들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대다수 사람들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내용 중에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없이 살기는 더합니다만,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여름 징역의 열가지 스무가지 장점을 일시에 무색케 해 버리는 결정적인 사실은 여름징역은 바로 옆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 사람을 단지 37 C의 열덩어리로 느끼게 합니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미워한다는 사실, 자기의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으로부터 미움을 받는다는 사실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더우기 그 미움의 원인이 자신의 고의적인 소행에서 연유된 것이 아니라자신의 존재 그 자체때문이라는 사실은 그 불행을 매우 절망적으로 만듭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미워하는 대상이 이성적으로 옳게 파악되지 못하고말초감각에 의해 그릇되게 파악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알면서도 증오의 감정과 대상을 바로잡지 못하고 있다는 자기 혐오에 있습니다." 

 

진통제도 더 이상 듣지 않아 스스로 곡기를 끊으셨다니 그 분 살아 온 일생의 단아함과 정갈함이 다 짐작이 됩니다..

 

누구에게 영향을 끼치고자 욕심내지 않아도 그 존재자체가 다른 사람들에게 본 보기가 되는 분...아쉽고 또 아쉽습니다. ㅠㅠ

 

한 영혼이 육신을 떠나는 일,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고 있는 이상 언젠가는 닥칠 일입니다만...

이 세상을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 하는 명제를 늘 지니고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기에

존경 할 만한 분이 돌아가시면 많은 사색을 하게 합니다.

 

과연 나의 마지막 순간은 어떠 할 것인가? 사실 인생을 잘 살았는지 못 살았는지는 타인의 평가보다는 

자신의 육신이 회복 될수 없음을 알고 삶을 정리하면서 목숨의 끈을 놓는 순간까지 자기자신에 의해 평가 될 것입니다.

가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 크게 마음에 걸려 있는 자책이 없을수 없겠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최선을 다해 살았다. ' 할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우리 사회에 의외로 사회적으로 합의된 정의나 지성을 분별하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흔히 자조적으로 얘기하는 ' 니가하면 로맨스, 남이하면 불륜이라'는 비유가 있습니다.

니가하든 남이 하든 로맨스가 있는 법이고 불륜은 불륜인 것임에도 팔이 안으로 굽는 객관적이지 못한 잣대

 

그 사람의 삶이 진실인지 가식인지 어떻게 알아? 하기도 하고 진심이나 양심이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고

하면서 폄혜하는 사람도 있지만 자신이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요.

인간의 내면적인 부분을 어떻게 볼수 있나 하지만 정신영역에서 풍부하게 내공을 쌓은 사람은

그 인품이 어떻게 풍겨나와도 풍겨 나오기 마련입니다.

 

쇠귀 신영복 선생님은

 

     경남 의령에서 태어나 밀양에서 성장하고 부산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고인은 서울대 경제학과·대학원을 졸업한 뒤

     육군사관학교에서 경제학 교관으로 복무하던 중 ,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68년 이른바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됩니다.

     1·2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우여곡절 끝에 무기징역형이 확정됐습니다.

    

     감옥에서 20년 20일을 복역한 신 교수는 민주화 이후인 1988년 광복절 특별 가석방으로  출소했으며,

     1998년 사면·복권을 받고 성공회대 교수로 재직 해 왔습니다.

신 교수는 오랜 수감 생활 동안 주고받은 편지와 글 등 230여편을 담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1998년 출간해 많은 독자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습니다


고인은 1989년부터 성공회대 강단에 섰으며 2004년 학내 '고전 강독' 강좌 내용을 정리한 '강의'를 펴냈고,

2006년 정년퇴임 후 석좌교수로 재직했으며 '처음처럼', '담론' 등을 내놓으며

이 시대의 대표적 지성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인은 '신영복 체' '어깨동무 체' 등으로 불리는 글씨체로도 잘 알려졌습니다.

고인이 교도소에서 지은 시 제목과 서체를 그대로 가져온 소주 '처음처럼'은 주류 시장에서 돌풍을 일으켰고,

고인의 글씨체는 관공서, 기업 등의 건물 현판에도 많이 사용됩니다.

(상업적으로 사용된 것은 '처음처럼' 하나인데, 서민들이 즐겨 마시는 술이라서 나름 의미가 있겠다고 
주변의 의견을 반영하여 결정을 했다고 합니다)

 

신 교수는 15일 밤 9시 30분쯤 서울 양천구 목동에 있는 자택에서 가족과 지인,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뒀으며 16일 새벽 1시쯤, 신 교수의 시신이 안치된 이대목동병원 인근에는 한밤중 갑자기 들려온 비보에

고인의 지인 30여명이 황망히 모여들었다고 합니다.

 2014년 희귀 피부암(흑색종) 진단을 받은 뒤 투병 생활을 해오다 암이 다른 장기로 전이되면서

끝내 세상을 떠나셨고진통제인 모르핀이 듣지 않자 스스로 곡기를 열흘 정도 끊었다고 합니다

 

유족으로는 부인 유영순(68)씨와 아들 지용(26)씨가 있습니다. 
 

 

 


사진=성공회대 제공

 

같은 학교 김창남 신문방송학과 교수가 이날 언론 대응을 맡아 유가족을 도왔고,

성공회대 학교장을 진행할 상주 역할을 맡은 성공회대 이정구 총장은 "총장과 교수의 관계가 아니라

동료 관계나 다름없다"며 "나에게 영향을 준 아버지랄까,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모르겠다"며 고개를 떨궜습니다.

이 총장은 "최근 건강 문제로 강의는 못했지만 느티나무와 같은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하셨다"며

"학생, 직원, 청소부원들과도 시간을 보내고 식사도 같이 하던, 측은지심이 상당했던 분"

또 "민주화 투사, 정신적 지주인 고인을 잃었으니 학교뿐 아니라 국가적으로 큰 인재를 잃었다"며

 "그분을 우리 학교에 모신 일이 학교의 영광이었다"고 강조했습니다.

아울러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지만, 흉상이나 동상 등 고인을 기념할 수 있는 설치물을 유가족과 상의해

준비할 생각"

 

성공회대 백원담 중어중국학과 교수는 고인에 대해

 "부석(浮石) 같은 분"이라며 "어디에 가셔도 쓰임새 있게 생활하고자 하신 분,

필요한 곳을 항상 먼저 찾아가주시는 분이셨다"고 회고했습니다.

백 교수는 "고인은 하나보단 둘이 덜 춥고 덜 덥다며 늘 함께하라고 말씀하셨다"며

"좀 더 선생님의 책을 알리지 못해 아쉽다"

 

1989년 출옥 후 고인의 첫 강의에서 대학원생으로서 사제의 연을 맺었던 빈민 활동가 송경용 성공회 신부는

 "그렇게 큰 스승님이 이렇게 쉽게 가실 줄은 몰랐다"며 안타까워했습니다.

김창남 교수의 아들인 김내현 교수는 "어릴 적부터 자주 뵈었는데, 할 말만 하시는 무뚝뚝한 분이면서도

늘 존댓말, 늘 열린 마음으로 말씀해주셨다"며 "진짜 어른이셨다". 

"맑고 곱게 그러나 단호하고 강인하게 우리시대를 지켜내셨던 분"

 

 

 

‘여럿이 함께’, ‘처음처럼’ 선생님이 하셨던 말씀입니다. 가르치고 배우는 사람이란 분별이 없어져야 함을

     따뜻한 눈빛으로 늘 알려주셨던. 맞담배를 늘 권하시며 아래에서 위를 알려주셨던 고마운 우리 선생님”이라고 돌이켰다.

김씨는 “(고인의 저서인)<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우리의 몫으로 남겨두시고 가신 분. 자격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제자로. 우리 선생님의 가시는 길에 글 놓습니다. 따뜻하시기를. 평안하시기를 빈다”고 추도했다.

 

“시대의 아픔을 온 몸으로 겪으신 참 지성인, 신영복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저 편 세상에서는 부디 편히 쉬소서”라며 고인을 기렸다.

 

 “통일혁명당 사건 연루 정도에 비하여 무기징역이라는 혹독한 대가를 치르면서,

그는 인간, 사회, 자연에 대한 고독한 성찰로 들어갔다”며

 “그가 구축한 넓고 깊은 인문의 세계에 우리 모두는 빚지고 있다”고 고인을 추모했다.

 

“스승이 없는 사회라며 입버릇처럼 이야기하는데, 후배에게 민폐 끼칠까봐 자신의 병환도 밝히지 않은 채

소리 소문 없이 생을 정리한 참 어른의 부음 때마다 통탄한다”면서 이 시대 참 어른 면모를 드러낸 고인의 삶을 기렸다.

 

작곡가 00도 고인의 저서 <더불어 숲>에 나온 구절 “나는 인간이 그 개인이 이룩해 놓은 객관적 ‘달성’보다는

주관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지향’을 더 높이 사야 할 것이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부단히 성장하는 책임 귀속적 존재이기 때문이다”를 인용한 뒤,

 “항상 희망은 사람이었던 신영복 선생님의 명복을 빈다”고 했다.

 

신 교수의 타계 소식에 누리꾼들은

 

      ‘나무가 나무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더불어 숲이 되어 지키자’라는

신영복 선생님 단정한 글귀는 옆 사람을 증오하게 만드는 여름 징역 같은 에피소드부터 삶에 대한 통찰까지,

많은 이야깃거리를 많은이에게 남기셨다”, “돈과 이윤, 권력과 야만이 아닌 오직 인간과 생명을 위한 세상을 꿈꿨던

우리 모두의 스승님이 떠났다”, “마음의 스승, 시대의 스승이 가셨네요. 이 허전함은 뭘까요. 선생의 책을 꼼꼼히 읽지 않은

죄책감은 또 뭘까요. 뵌 적은 없지만 항상 연모했습니다. 편안히 잠드세요”라는 등 애도의 글을 잇따라 올렸다.

 

      "우리 모두의 '마음의 스승', '시대의 스승'이 떠나셨다"

 

 

      “참 올바르게, 자기 신념에 충실하게 사셨다 느꼈다. 더불어 사는 삶을 실천하셨는데, 일찍 떠나셨다.”

 

“서로 위로하고 사랑하는 ‘작은 숲’ 되라”

 

영원한 정신적 스승이십니다~ 부디 영면하소서.. 

 

어두운 시대에도 별은 빛나고 그별은 많은 사람들의 희망이 되지요.~

편히 쉬시고 우리도 별이 되도록 풀무질을 해야겠지요.~~~

 

진정한 스승의 모습을 보여주고 가셨습니다.

“‘나무가 나무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더불어 숲이 되어 지키자" 명복을 빕니다. 

 

세상의 탁한 공기를 정화 시켜 주실분이 가셨군요, 오래 계셔야 할 분들은 왜 일찍가시는지

변절의 극치인 김지하와달리, 그냥그대로 그 자리에서 꿋굿하게 서 계셨던 고 이영희교수와

함께 시대의 참 지성이신 신영복 교수님의 명복을 삼가 빕니다~~~

시대의 지성이 별이 되셨네요

 

고인의 장례는 서울시 구로구 연동로 성공회대학교 학교장으로 치러지며, 빈소는 16일 오후 1시,

이 대학 대학성당에 마련됩니다. 17일 밤 10시까지 조문이 가능하며

영결식과 발인은 18일 오전 11시에 엄수됩니다.

 

 

유달리 일찍 부모님을 여의었고, 할머니, 시부모님 등 혈연을 비롯하여 많은 분들과 이별하면서

누가 돌아 가셨다고 해도 덤덤해지기 시작한 나이입니다만 

별세 소식 이후로 마음이 허퉁하고 일상이 허둥지둥 합니다.

거리가 가까우면 조문하고 싶은 분입니다. 영면하십시오. ~~ 동피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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