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희
밀풀
1.
밀풀에서 꽃이 폭폭 끓는다. 부풀어 오른 밀풀은 겨울과
여름에 유용하다. 문살에 밀풀을 바르고 창호지를
바르고 무성한 숨을 바른다. 덩달아 지붕위로 하얗고
얇은 첫눈이 내린다
귓불이 떨어져 나간 단풍잎 몇 개가 붓살이 쓸고 간 거친
자리에 폴짝 내려 앉는다. 겨울 문턱에서 말이 달리고
창호지 마르는 소리가 소복소복 들린다. 그러니까
문풍지는 밀풀이 모른 척한 날개, 열렸다 닫히는 문이
구수한 밀풀 냄새를 풍기며 날아 다닌다.
2.
김치는 꽃이다. 사이사이 익어가는 배추김치뿐만
아니라 한여름 열무김치를 들여다보면 온갖 색이 다
들어 있다. 푹 절인 열무에 홍고추를 썰어 넣고 푸른
실파를 뭉텅뭉텅, 마지막에 흰 물풀을 넣어 섞어 피는
꽃
밀풀이 돌아 다니는 동안, 풋내라는 밑줄에 문풍지가
달려 나온다. 꽃이 피려고 사각사각 감칠 맛이 날 때,
한데 섞이고 어우러져 동지섣달 한 겨울을 불러낸다.
밍밍한 국물에서 팽팽한 문풍지 맛이 나게 하는 것,
밀풀이 꽃을 피우는 방법이다
3.
살짝만 뜨거워져도 엉겨 붙는 밀풀의 힘, 배가 고프지
않은데도 배 아픈 때가 있다. 잘 풀어줘야 잘 붙는 힘,
풀죽은 열무가 밀풀을 만나 아삭아삭 기운을 차리듯
김치도 한겨울 문도 밀풀의 요기로 견딘다.
창호지 문에 구멍하나 뚫린 듯
열무김치 국물은 앙큼한 맛이다
2018. 농민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1967. 전남 무안 출생. 현 방송작가
* 농민신문당선작에 참으로 걸맞은 시고
고전적이면서 수식이나 복잡한 시적 장치가 없어 담백하고 정결하고 감칠 맛 나는 시라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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