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천수호 내가 아버지의 첫 사랑이었을 때

생게사부르 2017. 12. 9. 02:07

천수호


내가 아버지의 첫사랑이었을 때



아버지는 다섯 딸 중
나를 먼저 지우셨다

아버지께 나는 이름도 못 익힌 산열매

대충 보고 지나지칠 때도 있었고
아주 유심히 들여다볼 때도 있었다

지나칠 때보다
유심히 눌러볼 때 더 붉은 피가 났다

씨가 굵은 열매처럼 허연 고름을 불룩 터뜨리며
아버지보다 내가 곱절 아팠다

아버지의 실실한 미소는 행복해 보였지만
아버지의 파란 동공 속에서 나는 파르르 떠는 첫 연인

내게 전에 없이 따뜻한 손 내밀며
당신, 이제 당신 집으로 돌아가요. 라고 짧게 결별을 알
릴 때

나는 가장 쓸쓸한 애인이 되어
내가 딸이었을 때의 미소를 버리고
아버지 연인이었던 눈길로

아버지 마지막 손을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