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이승희 답장들

생게사부르 2017. 11. 3. 13:30

이승희


답장들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아직 멀었다는 거.끝이 보이지 않는 다는
거. 이 폐허를 다 지나려면 멀고 멀었으니 좀 반짝인들 어떤가요.
저녁이 오지 않을 것 같은 시간이 끝도 없이 자라고 있어요. 그렇
게 폐허는 말없이 자라는 세계. 당신에게 주지 못한 머리핀 두 개
를 반짝이게 하는 세계. 누가 지나든 넘어진 채 좀 있어도 되는
슬픔에 대해 천천히 이름을 지어 보는 일. 녹슬고 멍들어서 이제
좀 자유로워지는 일. 그해 여름의 골목에서 멈춰 선 기차들이 고
개숙인 채 여름 내내 중얼거리는 말을 듣는 일. 내겐 없는 기억
들이 되돌아와 내 뺨을 후려 칠 때 왜 그래요라고 말하지 않는 일.
폐허 속에 가만히 나를 잠재우는 일. 다시는 살아나지 않으려 애
쓰는 일. 그렇게 반짝이는 일.


' 시와 미학' 2014.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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