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최금진 아파트가 운다

생게사부르 2017. 6. 28. 01:41

아파트가 운다 / 최금진


 

가난한 사람들의 아파트엔 싸움이 많다

 

건너뛰면 가닿을 것 같은 집집마다

 

형광등 눈밑이 검고 핼쑥하다

 

누군가는 죽여달라고 외치고 또 누구는 실제로 칼로 목을 긋기도

한다

 

밤이면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이

 

유체이탈한 영혼들처럼 기다란 복도에 나와

 

열대야 속에 멍하니 앉아 있다

 

여자들은 남자처럼 힘이 세어지고 눈빛에선 쇳소리가 울린다

 

대개는 이유도 없는 적개심으로 술을 마시고

 

까닭도 없이 제마누라와 애들을 팬다

 

침에는 십팔평 칸칸의 집들이 밤새 욕설처럼 뱉어낸


악몽을 열고 아이들이 학교에 간다


운명도 팔자도 모르는 화단의 꽃들은 표정이 없다


동네를 떠나는 이들은 정해져 있다


전보다 조금 더 살림을 말아먹은 아내와


그들을 자식으로 두고 죽은 노인들이다


먼지가 풀풀 날리는 교과서를 족보책처럼 싸짊어지고 아이들이
돌아오면


아파트는 서서히 눈에 불을 켠다


이빨이 가려운 잡견처럼 무언가를 갉아먹고 싶은 아이들을 곁에

세워 놓고


잘사는 법과 싸움의 엉성한 방어자세를 가르치는 젊은 부부는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

 

밤이면 아파트가 울고, 울음소리는

 

근처 으슥한 공원으로 기어나가 흉흉한 소문들을 갈기처럼 세우고 돌아온다

 

새벽까지 으르릉거린다

 

십팔, 십팔평 임대아파트에 평생을 건 사람들을 품고

 

아파트가 앓는다, 아파트가 운다

 

아프다고 콘크리트 벽을 쾅쾅 주먹으로 머리로 받으면서 사람들이 운다

 

 

                      - ' 새들의 역사'  창비, 2007.

 

 

 

           최금진: 충북제천

           2001. 창비신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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