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소란
약국은 벌써 문을 닫았고
아프다,는 한마디를 위해 이 길을 걸어왔다 그러나
하루는 무참히 저물었구나 오래 뒤끓던 몸을 뉘었구나
어느 새벽 우리가 애달피 낳은 병은 진종일 한숨으로
자라
오늘의 육중한 밤을 이루었구나 녹슨 셔터가 내려앉은
구석구석
해쓱한 낯빛의 상점들은 서둘러 서로의 이름을 지우고
술렁이던 밥집과 술집은 다만 침묵의 메뉴판을 내걸었
구나
잠시 잠깐 하늘의 흐린 혈관을 두드리는 빗방울
링거를 타고 흐르는 수액처럼 그러나
애당초 잘못 전해진 처방전처럼
간신히 붙박아둔 추억조차 말갛게 물러져 어디론가 흘러
가는데
빗줄기 사위도록 간판은 보이지 않고 아무 불빛도 손 흔
들지 않아
이제 와 나는 다만 습관처럼 서성일 뿐 한때의 조악한 통
증을 둘러업은 채
약국은 벌써 문을 닫았고 여기 골목
시린 이마를 짚어주는 붉은 이 이제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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