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규
논두렁
찰방찰방 물을 넣고
간들간들 어린 모를 넣고 바글 바글 올챙이 우렁이 소금쟁이 물거미 미꾸라지 풀뱀을 넣고
온갖 잡초를 넣고 푸드덕 물닭이며 논병아리며 뜸부기 알을 넣고
햇빛과 바람도 열 댓 마씩 너울너울 끊어넣고
무뚝뚝이 아버지를 넣고 올망졸망 온 동네 어른아이 모다 복닥복닥 밀어 넣고
첨벙첨벙 휘휘 저어 마시면,
맨 땅에 절하듯
누대에 걸쳐 넙죽넙죽 무릎 끓고 낮게 엎드린 생각들 길게 이어 붙인
저 순하게 굽은 등짝에 걸터앉아
미끈 유월, 그 물텀벙이 한 대접씩 후르륵 뚝딱 들이켜면
허옇게 부르튼 맨발들 갈퀴손가락을 건더기채 꿀떡 꿀떡 넘어가겠다
1961. 경기 화성
1998. 현대시학
시집 ' 밥그릇 경전' ' 다국적 구두공장 안을 엿보다'
* * *
모내기는 모를 논에 꽂는 일인 줄만 알았지 이렇게 많은 사람과 생명과 자연이 함께 참여하는 풍요로운
축제인 줄은 몰랐네요. 모내기는 ' 굽은 등짝'과 '허옇게 부르튼 맨발'과 '갈퀴손가락들'이 하는 힘든 노동
인줄만 알았지 이렇게 아기자기하고 아름다운 즐거움이 넘치는 놀이인 줄은 몰랐네요
벼는 심어 놓기만 하면 물과 흙의 양분을 먹으며 저 혼자 자라는 줄만 알았지 이렇게 많은 이웃들이 함께하면서
도와주고 튼튼하게 길러주는 줄은 몰랐네요. 우리가 매일 먹는 쌀에 이렇게 다양한 자연과 흥겨운 노래와 드넓은
세계가 들어 있는줄도 몰랐네요.
쓸모 없는 것들, 소외된 것들, 아무 힘도 없는 것들이 모여서 장엄한 아름다움과 살가운 온기를 만들어 내는
백석의 <모닥불> 버전을 보는 듯 합니다. - 김기택-
백석
모닥불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가랑잎도
머리카락도 헝겊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왓장도
닭의 짗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
재당도 초시도 門長늙은이도 더부살이 아이도
새사위도 갓사둔도 나그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시도 땜쟁이도 큰 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쌍하게도
몽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가 있다.
- 시집『사슴』 193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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