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H. 로런스
제대로 된 혁명
혁명을 하려면 웃고 즐기며 하라
소름 끼치도록 심각하게는 하지마라
너무 진지하게도 하지마라
그저 재미로 하라
사람들을 미워하기 때문에 혁명에 가담하지
마라
그저 원수들의 눈에 침이라도 한번 뱉기 위해서
하라
돈을 좇는 혁명은 하지 말고
돈을 깡그리 비웃는 혁명을 하라
획일을 추구하는 혁명은 하지마라
혁명은 우리의 산술적 평균을 깨는 결단이어야
한다
사과 달린 수레를 뒤집고 사과가 어느 방향으로
굴러 가는가를 보는 것이란 얼마나 가소로운가
노동자 계급을 위한 혁명도 하지 마라
우리 모두가 자력으로 괜찮은 귀족이 되는 그런
혁명을 하라
즐겁게 도망하는 당나귀처럼 뒷발질이나 한번
하라
어쨌든 세계노동자를 위한 혁명은 하지마라
노동은 이제껏 우리가 너무 많이 해 온 것이
아닌가?
우리 노동을 폐지하자, 우리 일하는 것에 종지
부를 찍자!
일은 재미일 수 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일을
즐길 수 있다
그러면 일은 노동이 아니다
우리 노동을 그렇게 하자! 우리 재미를 위한
혁명을 하자!
류점석 옮김
데이비드 허버트 리처드 로렌스(David Herbert Richards Lawrence )
1885년 9.11 ~ 1930년 3.2.) 영국의 소설가, 시인, 문학평론가
" 과거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
과거의 역사적 경험에서 뭔가를 배우고 얻지 못하면 밝은 미래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오늘은 4.19혁명 57주년입니다.
광화문 세종로 종로 일대를 노도와 같이 휩쓸던 젊은 함성들.
"사악과 불의에 항거하여 압제의 사슬을 끊고 분노의 불길을 터뜨린"
민족사에 영원히 꺼지지 않을 민주의 횃불 4월혁명.
그러나 그 혁명은 ' 미완의 혁명'으로 제대로 "승리한 민중의 역사"로 자리잡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 해 박정희 김종필 등이 일으킨 5.16 군사쿠데타 때문이지요.
군부세력들은 역사 교과서에 학생들과 민중의 희생을 '4.19 의거'로 격하시키면서 5.16을 '혁명'으로 기록했습니다
물론 당시 우리 국민들의 민주의식 수준을 미루어 짐작해 보면 '의원내각제'는 시기상조였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논외로 하더라도
그때 장악한 군부독재 권력, 청산되지 못한 친일세력들에 의한 적폐가 수십년 동안 더깨로 쌓이고 쌓여
기승을 부리며 온갖 해악을 이 땅에 뿌려대다가 결국 현직 대통령의 파면으로 귀결되었다 할 것입니다.
혁명은 사회변화의 흐름에 따라 여러형태로 변화합니다.
최근 경험한 대표적인 형태가 촛불집회와 SNS가 가져온 혁명이라 할 것입니다.
새로 시작되는 19대 대통령 선거는 또 다른 혁명, '선거혁명'이 되면 좋겠습니다.
신동집 시인이 외쳤던 ' 껍데기는 가라!'
" 껍데기"들 일부가 청산된 분위기는 있지만, 부자가 망해도 3년은 간다고 아직 사회 구석구석
적폐세력이 남아 있다는 것...이번 선거혁명을 통해 종지부를 찍고 대한민국의 발전과 민족번영의
길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 헌법 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국민이 나라의 주인입니다.
지금 현재 대통령직이 공백이고 또 경상남도는 도지사 역시 공백이지만 조직이 다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전 학교 있을 때, 교사가 휴가를 내거나 출장을 가면 수업에 공백이 생겨 대강을 넣어야 하고
또 담임일 경우 학급학생들 관리를 위해 부담임이 들어 가는 등 일정이 바빠지지만
학교관리자인 학교장이나 교감이 학교를 비운다 해서 아무 문제 없이 조직이 흘러 갑니다.
쓸데없이 권위나 세우고 대접이나 받으려하는 관리자일 경우 관리자가 없음면 오히려
더 잘 돌아가고 직원 화합이 잘되고 ㄱ무실, 행정실 분위기가 더 좋을 때가 많았습니다.
따라서 이런 시대에 제왕적인 대통령이나 소통불능인 대통령은 " 있으나 마나" 한 존재이거나
심하면 차라리 ' 없으면 더 잘 돌아가는 존재' 이기 쉽상입니다.
오늘날의 대통령은 국민들이 선출해서 법에 규정된 임기동안 그 위임된 권한을 행사하는 공무원의 한 사람입니다.
새로 구성될 정부는 완벽하지 못한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국민들이 합의한 법과 질서,
제대로 된 사회시스템에 의해 움직여 나가는 대한민국으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작가이자 풀꽃 연구소 소장인 최성각씨가 이전의 총선 이후 소개한 ' 슬픈 당나귀들의 포기할 수 없는 헛발질'
에서 일부 발췌한 시 해설을 덧 붙입니다.
< 이 시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그 이전의 오랜시간 동안 모름지기 " 사람이 이 세상에서 태어나 할 일은
두가지 뿐인데 그것은 '사랑'과' 혁명'이다"라고 생각하고 있던 철부지였다
...중략...
내 20대를 관통했던 길고도 긴 유신시절을 타력으로 지난 뒤, 나이들어 우연히 이 번역시를 접했을 때
이 시가 하필이면 그의 소문난 소설 <채털리 부인의 연인>이 외설물로 찍혀 평생 고생했다는 D.H. 로렌스에
의해 씌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당혹감과 신선함은 낯설면서도 유별났다.
요컨대, 이 시를 접하기 전에 나는 혁명은 모름지기 '소름 끼치도록 진지'한 영역으로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낭패감은 더욱 컸다
그랬다. 혁명이라는 해묵은 관념에 관한한, 이 전복적인 시는 장쾌하기보다는 어처구니가 없고,
못에 찔린 풍선처럼 사람을 맥빠지게 했고, 유머스럽다기보다는 스승의 아내를 사랑했고 그 대가로
주류에서 밀려 평생 가난에 시달리던 로렌스의 삶처럼 쓸쓸하고도 처연하면서 한편 당당했다.
그런데 다소 자조적이라고? 그럴리가 있는가. 광부의 아들이었던 로렌스의 20세기는 학살의 시대였고
또한 혁명의 시대였다. 노동자 계급 출신이 심지어' 노동자 계급을 위한 혁명은 하지망라'고 하니 사조나
유파에 종속되지 않는 이 잠언류의 인생파적 시는 반계급적이라기보다는 그 너머의 차원인,
삶이 매 순간 혁명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자의 체험시로 읽어야 할 것이다
시인은 어떤 혁명을 권장하고 있는가? 그것은 '우리모두가 자력으로 괜찮은 귀족이 되는' 혁명이다.
자본주의는 시작부터 필연적으로 천민에게 합당했다. 슬프게도 혁명가들 중에도 덕이 결여된 천민들이 많았다.
방금 선거가 끝났다. 이 번역시를 끄집어 내면서 나는 이번에도 성과를 내지 못한 녹색당이 떠오른다.
의무만 강요받았던 국가로부터 기본소득을 받는 것이 권리라고 녹색당은 주장했고 ' 노동이 재미'여야
한다는 로런스의 욕먹을 꿈에 그들은 일찍부터 동감했다.
모두가 경제발전이라는 지속불능의 낡은 깃발(인식의 산술적 평균)을 무기처럼 흔들어 댈 때 대구 달서갑에서
30.1%의 놀랍고 눈물겨운 득표율을 얻어낸 내 한심한 후배 변홍철은" 자동차가 전쟁을 일으킨다"는 권정생 선생의
시대 착오적인 말씀이 적힌 피켓을 목에 걸고 " 더 이상의 경제발전은 죄를 짓는 일이다" 라고 호소했다.
이번에도 헛발질로 그쳤지만, 그 슬픈 '당나귀'들은 ' 돈을 좇는 혁명'이 아니라 '돈을 깡그리 비웃는 혁명'을
소망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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