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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길 명동촌 윤동주 생가, 대성학교

생게사부르 2016. 8. 21. 01:47

연길 명동촌윤동주 생가, 대성학교

 

 

 

연길시는 20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근래 개발 역사는 100여년 정도 된다 .

19세기 초 조선의 이재민과, 산동성, 하북성의 가난한 백성들이 이 곳의 농토를 개간하기 시작했다.

그 후 일본인이 이곳을 강점한 이후 1934년 간도성의 직할시로 삼고 동북지방의 자원약탈 교두보로 삼았다

해방이후는 중국 공산당 길림성위원회가 관리하다가 1952년 조선 연변족 자치주가 성립되어 자치주 직할시로 되었다 

 

연길시는 연변 조선자치주 인민정부 청사가 있는 소재지로 연변 중앙부에 자리 잡고 있으며

연변서 가장 큰 도시로 정치, 경제 등 모든 면에서 중심도시이다.

총면적 1340 평방 KM, 인구 30만이 넘는 가운데 조선족, 한족,몽골족, 회족등 11개 민족이 살고 있다

한때 59% 에 이르렀던 조선족이 지금은 계속 줄어들어 한족대 조선족의 비율이 6:4 정도가 되었다 한다.

 

 

 

 

 

우리를 안내한 조선족 가이드는 어머니가 서울에서 일하고 있고,

본인도 서울에서 결혼해서 살 예정이어서 현재 아버지만 남아 계신 형편이며 남한으로 들어 온 조선족들은

 다시 연변으로 돌아오고 싶어하지 않아서 거의 마을이 비어가고 있다고 했다.

 

중국이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조선족이 "중국변방의 소수민족이되 중국에 속함'을 특별히 강조하며

 정신교육을 시킬 필요도 없이 '연변= 조선족 자치구'라는 통념이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 같은 느낌,

중국은 은근히 그런 상태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또 간혹 그런 얘기들을 듣기도 했다. 조선족 들이 우리나라 들어와서는  대한민국의 혈연을 내세우며

취업이나 생활기반을 잡으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 중국인이나 다름없다는 얘기 같은...

 

그럼에도 일제강점기를 피해 떠났던 우리 민족의 역사, 항일운동의 역사를 공유하는 현장이기에

대한민국이 본토인 이상 연변에 흩어진 우리조상들의 흔적들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지키려는 노력을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다

 

 윤동주를 우리의 민족시인으로 아끼는 만큼 그 생가나 대성학교를 지원하는 단체가 있고,

관광으로 방문하는 남한 사람들이 기부하는 지원금이 그런 사적지 운영과 유지에 도움이

 된다니 한편으로 다행이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윤동주 생가가 있는 명동촌

 

 

 

 

용정은 길림성 연변조선자치주 중부에 위치하며 연길에서 남서쪽으로 20Km 떨어져 있는 상공업도시다.

1913년 연변(옌볜)현이 설치되었다가 1983년 용정(룽징)현으로 개칭하였고 1988년 7월 市로 승격하였다

우리가 통상 간도라고 불렀던 곳이다

시내 한 가운데 3.13만세 운동의 현장인 용정중앙 소학교를 비롯하여 1880년경 한국인이 우물을 처음 발견하였다는

용정기원 우물이 있다. 창투철도(長春~圖們)가 시내로 지나가며 문화유적으로는 비암산의 일송정(一松亭),

3.13 반일의사 묘지, 시인 윤동주 묘지, 한왕산고성(汗王山古城) 유적 등이 있다

시내는 현대적 도시로 급성장하고 있으며, 백두산 관광기지로도 큰 몫을 하고 있다

 

 

 

윤동주 생가 시비

 

 

 

  

 

 

 

 

 

 

윤동주 외조부 김약연 선생

명동학교와 명동교회를 세워 교육 , 전도 사업에 힘씀

 

 

 

 

시인 윤동주 생가는 1900년경 용정시 남쪽에 있는 명동촌에 그의 조부 윤하현 선생이 지은 집으로

기와를 얹은 10간과 사랑채 곳간이 달린 조선족 전통 구조의 남향 기와집으로

시인은 1917년 12월 30일 이 집에서 태어났다

 

1932년 4월 시인이 은진중학교로 진학하게 되자 그의 조부는 용정으로 이사하고 이 집은 팔려

다른 사람이 살다가 1918년 허물어졌는데

1993년 4월 명동촌의 역사적 의의와 유래를 고려하여 용정시 정부에서 관광지로 지정하였다

 

이에 용정시 지신향 정부와 용정시 문련은 연변대학 조선역구 중심의 주선으로 사단법인 해외

한민족 연구서소의 지원을 받고 국내외 여러 인사들의 정성에 힘입어

1994년 8월 연변대학 조선연구센터 주선으로 역사적 유물로서 윤동주 생가를 복원 하였다.

 

 

 

 

 

 

서시 시비 앞에 선 세라 샘

 

 

북방은 추위로 방과 부엌이 일자로 연결 되어 있다

 

 

정지(부엌)간이 방과 연결되어 건물 안에 있었다, 심지어 축사도 주택 건물안에 지어져 있는경우를 보는데

추운지방에서는 동선을 그렇게 만들어 활동성을 높였을 것이다.

 

 

용정서 인쇄된 시집을 한권 샀다

 

 

시인은 가고 없어도 어디나 꽃은 피고

 

 

반도보다 일찍 핀 코스모스, 계절을 앞서 가고 있고

 

 

 

 

 

용정 대성중학교는 윤동주시인을 비롯해 문익환목사등이 다닌 학교로

1921년 교원7명과 160명의 학생으로 시작되어 일제강점기 민족주의 교육의 산실로서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애국지사를 배출한 곳이다.

 

연길에 있는 중학교를 모두 모아 새 건물을 완성하여 실제 학생들이 다니고 있는 학교가 왼편에 있었고 

이전의 학교는 옛모습 그대로 용정중학교 내에 복원되어 있었다.

 

 

현재 학생들이 다니고 있는 학교

 

도착 했을 때 이미 문을 닫은 시간이라 여기까지 와서 못보고 돌아 가야되나 하고 아쉬운 차에

관리인이 열쇠를 들고 와서 학교 안으로 들어 갈수는 있었지만 건물 안으로는 들어가 보지 못했다.

 

들어가 보지 못한 건물 안 사적전시관에는 윤동주의 사진과 화보, 책자를 비롯하여 1900년대 초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룽징과 주변지역의 역사를 보여주는 각종 사료를 전시하고 있다고 하는데

먼 거리니 언제 다시 한번 온다는 게 쉽지 않을 터라 많이 아쉬웠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발길 돌리기 직전 관리인이 왔다. 그래도 실내 유물은 볼수 없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