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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북중접경지 여순, 대련

생게사부르 2016. 7. 23. 23:29

백두산 북중접경지 여순, 대련 

 

 

금강산은 겨울에 갔는데, 백두산은 여름에 갔네요.

 

'백두산 북중접경지 평화감성기행'이란 주제였으며 4박 5일 일정으로 인천에서 대련으로 먼저 갔습니다.

여순대련 지구를 둘러보고 18시간 열차를 타고 백두산으로 갔다가 두만강지역의

북,중,러 접경지역을 둘러 본 다음 출국은 연길에서 인천으로 오는 코스였습니다.

 

우선 접하는 중국분위기, 

 

 

도로 풍경

 

 

빌라 같은 아파트? 너무 높지 않아 마음에 든다

 

 

여순항의 배후지역에 있는 203고지부터 들렀습니다

사드배치로 시끄러운 요즘 우리나라 정세가 외세의 각축장이 되다가 일본 식민지로 들어가던 근대상황과

비슷하다는 얘기들을 하곤 합니다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면서 조선에서 우위를 점한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

강화도 조약 이후 임오군란, 갑신정변 등 사사건건 첨예하게 신경전을 벌려 오던

청 나라를 완전히 따 돌리게 됩니다. 

이에 불안을 느껴 친러정책을 쓰려다가 명성왕후가 시해당하고 아관파천을 거치면서

결국 일본은 러시아와 전쟁을 치르게 됩니다

 

여기 203고지 전투는 1904년 9월 일본이 러시아에 대해 결정적인 승리를 가져오게 되는 계기가

만들어지는 역사적 현장입니다.

그러면서 청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받게되는 배상급과 영토할양에 재미 들린 일본이 군사적으로 얼마나 물량공세를

퍼 부었는지 ' 승리 했지만 빚만 늘어 난 ' 빗좋은 개살구' 식의 전쟁이었다는 평가

 

그 당시 청이나 러시아는 나라는 컸지만 근대적 질서체제로 나라를 정비하는데 사실상 실패하면서

일본에게 패하게 되는 것이지요.

 

어떻든 일본은 러일전쟁을 치르기 위해 독도를 불법 점유하고 진해에 군항을 설치했고

러일전쟁 중 가장 치열했던 전투인 203고지 확보를 통해 여순항을 차지함으로써 러일전쟁의 승리를 위한

교두보를 마련하게 됩니다.

 

웃긴 얘기지만 청일전쟁은 조선 땅에서, 러일 전쟁은 일본이나 러시아와 하등 상관 없이 조선과 청나라 땅에서

이루어졌다는 게 결국 그 대상이 조선이었다는...

 

이후 을사조약, 정미조약을 거쳐 한일병합이 이루어지고 조선은 일본 식민지가 됩니다

 

 

 

 

 

 

 

 

 

여순감옥은 1902년 러시아가 먼저 건축하기 시작했습니다만 1904년 뤄순을 점령한 일본에 의해 1906년 완성

되었습니다.

1907년까지 확장 되었으며 여러형태를 지닌 275개의 감방이 있으며 2천여명을 동시에 수용 할 수 있는 규모였습니다.

일본은 조선인 항일인사와 중국인 항일 인사를 구금했습니다.

 

1909년 안중근 의사가 거사를 일으켜 이등박문을 저격한 곳이 '하얼빈'인데

일본은 자신들이 영향력을 행사 할수 있는 여순으로 데려와서 재판을 하려고 엄청 애를 씁니다.

 

 

 

 

 

여순 감옥

 

 

창살

 

 

 

 

 

안중근 의사 유품

 

 

안중근 의사 '동양평화론' 저술하던 책상

 

사진만으로도 갇혔다는 느낌이 물씬

 

 

 

단재 신채호 선생님이 수감되었던 방

 

 

 

이항복 선생의 후손, 윗대 이조판서 명문가 집안의 6남매가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우리나라서 드물게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집안 , 이회영 선생 수감 됐던 곳

 

 

 

교수형 처형 집행장입니다

 

 

 

아래 받쳐진 원통에 시신을 구겨 넣었다 하네요.

 

아래 사진은 주변 매장지에 있던 시신들을 가져다 놓았습니다.

그 당시 참상을 부분적으로나마 알게 해 주는 것 같네요. 지난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야 하는데

 

아직도 지구 촌 구석구석 이런 야만적인 행위가 계속되고 있는 곳이 많고,

우리는 정작 안중근 의사 유해조차 찾지 못 하였으며

조국 땅에 모셔오지 못하고 김구선생님이 만든 가묘만 덩그러니 있는 현실입니다

 

 

여순 감옥에서 교수형에 처해진 시신들이 이렇게 유골이 되어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재판 받았던 여순 관동 주법원은 1906년 9월 여순감옥과 동시에 설립되어

1906년부터 1935년까지 총 21376건의 판결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