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박지웅-서큐버스

생게사부르 2016. 7. 26. 18:02

박지웅


서큐버스


신도림역에서 애인의 침대로 갈아 탈 수 있다
지하철에서 침대로 환승하는 이 구조에 놀랄 일은 없다
참 많이들 드나드는 곳이니 뭐 대수겠는가
누구든지 올라타면 목적지까지 갈 수 있다

애인은 종이처럼 쉽게 불붙는 입술을 가졌다
아래쪽은 생각마저 들어서면 뜨거워지는 곳으로
예민하지만 보통은 죽은 쥐처럼 붙어 고요하다
바로 애인이 시작되는 곳이다
그곳을 문지르면 애인은 찍찍거린다

희안한 일도 아니다 가랑이에 대고 피리를 불면
애인의 애인들이 나온다, 찍찍거리며
인물은 애써 무덤덤한 말투로 넉살을 부린다
역시 이곳에는 쥐가 많군
사랑하는 서큐버스, 당신이 죽으면 지하철에 앉혀 둘게

인물은 쥐 떼를 다른 꿈에 버릴 생각이다
물오를 육체에서 쏟아져 나온 시끄러운 쥐들
더럽게 찍찍거리는 애인의 정부(情夫)들을 이끌고
나서는
이 새벽은 세상이 만든 조잡한 불량품이다

문 앞에 버린 거울, 그 안에 처 박아 함께 버린 하늘
땅에 떨어진 아이스크림처럼 더러운 구름이 붙어있다
구름 위에 벽들을 얹고 지근지근 밟는다
지하에 떠 있는 하늘은 무용지물이다
저 쥐새끼들에게도 아무 상관 없는 일이다
어차피 볕 들 날은 오지 않을테니

악몽에서 악몽으로 환승하는 지하도
꼬리에 꼬리를 문 긴 난동의 악보가 꿈길을 덮고 있다
여기에 이것들을 풀어놓은 자는 그대인가 나인가

아, 모든 밤의 여행지는 몽마(夢魔)의 침실로 통하고
신도림은 악몽의 환승역
수군대고 찍찍거리는 승객은 모두 아는 얼굴들
가깝거나 낯익은 얼굴이 악몽의 온상이니
보라, 악몽은 실체를 경유한다
그래야 더 실감나게 파고 들 수 있을테니

인물이 신도림에서 피리를 분다
얼굴들이 몰려온다
그림자들이 찍찍거리며 뒤에 따라붙는다

인물은 길어지고 늘어지고 본인에서 멀어진다
얼굴이 얼굴을 갈아타고 퍼져나간다
인물은 번식하고 애인은 번성한다


<시인동네> 2015.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