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황지우 눈보라

생게사부르 2017. 12. 21. 16:15

황지우


눈보라


원효사 처마끝 양철 물고기를 건드는 눈송이 몇 점
돌아보니 동편 규봉암으로 자욱하게 몰려가는 눈보라

눈보라는 한 사람을 단 한사람으로만 있게 하고
눈발을 인 히말라야소나무 숲을 상봉으로 데려가 버린다

눈보라여, 오류 없이 깨달음 없듯,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는 사람은 지금 후회하고 있는 사람이다

무등산 전경을 뿌옇게 좀먹는 저녁 눈보라여,
나는 벌 받으러 이 산에 들어왔다

이 세상을 빠져 나가는 눈보라, 눈보라
더 추운데, 아주아주 추운 데를 나에게 남기고

이제는 괴로워 하는 것도 저속하여
내 몸통을 뚫고가는 바람소리가 짐승 같구나

슬픔은 왜 독인가
희망은 어찌하여 광기인가

때리는 눈보라 속에서 흩어진 백만대열을 그리는
나는 죄 짓지 않으면 알수 없는가

가면 뒤에 있는 길은 길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앞에 꼭 한길이 있었고, 벼랑으로 가는 길도 있음을

마침내 모든 길을 끊는 눈보라, 저녁 눈보라,
다시 처음부터 걸어오라, 말한다



 

'시로 여는 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상웅 고비  (0) 2017.12.23
김경주 먼 생  (0) 2017.12.22
최승호 대설주의보  (0) 2017.12.20
김경주 폭설, 민박, 편지1  (0) 2017.12.17
김경주 기미(幾微)- 리안에게  (0) 2017.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