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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 칼로의 미술관 ' 푸른 집'

생게사부르 2017. 10. 17. 01:43

프리다 칼로의 미술관 ' 푸른집'


 

 

 프리다 칼로의 ' 푸른집' 입구

 

 

인터넷 예약과 현장 티켓 구매 두가지를 병행하는데 예약을 해도 입장시키는 인원이 제한되어 있어요.

아침 일찍 서둘러 가도 대부분 이렇게 길게 줄이 늘어섭니다.

 

개인적으로 '프리다 칼로'(1907-1954)라는 여류화가,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 세상을 살다 갔음에도

이 대단한 여성을 간접적으로라도 알게된 게 그렇게 오래된 건 아니네요.
'로사 몬떼로' 라는 스페인 여성 저널리스트가 1995년에 쓴 책 ' 시대를 앞서간 여자들의 거짓과 비극의 역사'라는

책을 읽고였으니 말입니다. 그래도 내가 태어 난 해에 미술관이 개관되었으니
미술 전공이었더라면 그보다 좀더 일찍 알게 되었을까요?

어떻든 프리다 칼로의 삶은 충격 자체입니다.

육체적으로 큰 질병없이 성장한 일반인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육체적인 고통 때문이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짧은 생애동안 화가가 되고 싶었던 자신의 꿈을 이룬 의지의 화신입니다. 

 

 

    

 

 

 

 

 

헝가리 출신의 사진작가였던 유태인 아버지와 혼혈 인디오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이 여성은
6세때 척추성 소아바비를 앓고 꼬박 9개월을 침대에 누워 있다가 회복된 이후 오른쪽 다리를 절게 되었습니다.
설상가상 18세에 버스를 타고 가던 중 전차가 버스를 덮쳐버리는 큰 사고를 당하게 됩니다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구겨져 버린 버스사고의 참사 속에서 옷이 갈기갈기 찢겨 나간 채, 거의 알몸이다시피

발견된 그녀, 승객용 손잡이가 달린 쇠막대기가 그녀의 옆 가슴을 뚫고 들어가 허벅지로 나와 있었고 누군가의

물감통이 터졌는지 청동가루가 그녀를 뒤덮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사고로 프리다의 척추는 세 조각으로 나뉘어 졌고 대퇴골과 갈비뼈가 부셔졌으며 골반과 소아마비로 온전치

못하던 다리가 완전히 짓이겨졌고 복부에 구멍이 뚫렸습니다. 

이후 평생 죽음을 안고 살다가 1954년 만 47세 생일을 지내고 일주일 후 죽었습니다.

멋대로 떨어져 나간 육신의 부위를 잡아 당겨서 고리에 걸고 깁스를 하는 병고를 이겨내면서 거의 30년 정도

200여점의 작품을 남겼는데 인생의 대부분을 침대 위에서 보낸 그녀는 침대에 거울을 달고

천형이었던 자신의 육체를 캔버스에 옮겼던 탓에 자신의 심리가 반영된 자화상을 많이 남깁니다.

 

갈기갈기 찢긴 육체, 살점이 드러나 보이는 뒷 모습, 피로 흥건한 웅덩이, 구멍이 휑한 시선 등의 작품들...

설흔번 넘는 수술과 다리 절단, 남편의 외도와 이혼, 세번의 유산등 육신의 고통에다 정신적인 고통까지 더하여

마지막에는 술과 진통제에 의지하기도 하지만 그녀의 삶에 대한 초인적인 용기와 강인한 의지력, 예술과 혁명에의 열정,

그녀를 알게되는 사람들에게 ' 삶의 숙연함' 과 ' 경외감' 까지 갖게 합니다.

    

 " 나의 평생소원은 단 세 가지, 디에고와 함께 사는 것, 그림을 계속 그리는 것, 혁명가가 되는 것이다.”

 자기 육체의 핸디캡을 뛰어 넘어 그녀는 자신의 소원을 이루었다고 보여집니다.

애증이 교차되었지만 디에고는 프리다의 예술활동과 일상 생활에 뒷바라지를 아끼지 않았고 칼로 사후

저택을 미술관으로  내 놓게 되어 오늘 날 세계인의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오늘 날, 극히 멕시코적인 색깔과 전통을 사랑한  멕시코가 가장 아끼는 국보급 화가로 국민적 사랑은 물론

전 세계에서 그녀의 삶과 예술에의 열정을 직접 느끼러 방문하고 있으니까요.

 

 

군데군데 안내문이 세워져 있는 저택 정원입니다

 

 

 

 

 

 

 

 

 

 

전시실 한 군데는 프리다 칼로의 일생과 일상에서 착용 했던 코르셋과 의상, 척추와 다리 보조기구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 전시실은  프레쉬만 터트리지 않으면 사진을 찍을 수 있었고, 작품이 전시된 저택 실내는 사진을 찍으려면 따로 비용을

 지불하고 계산된 영수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일반인들도 평생 침대에서 지내는 시간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만 특히 칼로는 인생의 대부분을 침대에서 보냈다고

 합니다. 그 침대에 거울이 달려있고 이젤이 세워져 있어 자신의 심리를 자화상으로 그려내는 작업을 했습니다.

 

 

 

 

 

 

 

프리다 칼로에 대한 자료는 이전부터 모아 놓은게 많은데 오늘은 미술관 관람부분을 소개했고

작품 세계는 다음에...             

생애 마지막 부분과 그 삶에 대한 평가를 올리며 이번 포스팅은 마칩니다.

 

1940년대 말부터 건강이 악화된 칼로는 결국 오른쪽 다리를 잘라내야만 했고 몇 차례의 척추 수술은 실패를 거듭했다

칼로는 하루의 대부분을 누워서 지내야만 했으며 휠체어에 기대 간신히 앉아있을 수 있었다.

아프지 않은 날이 없었지만, 칼로는 그림을 포기하지 않았다. 하루에 서너 시간씩 그림을 그려나갔다.

그리고 1948년 멕시코 공산당에 다시 입당한 뒤 사회적인 관심과 참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녀의 정치적 성향은 말년에 그린 그림들에 표현되었다.

 

1953년 멕시코에서는 처음으로 칼로의 개인전이 열렸다. 그녀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한 리베라와

친구들이 열어준 전시회였다. 일어나 앉지도 못하게 된 칼로는 침대를 그대로 전시회장으로 옮겨 개막식 축하연에 참석했다.

 그녀는 누운 채로 전시회를 보러 온 군중들 앞에서 노래하고 마시며 함께 기뻐했다.

 

1년 후인 1954년 7월 칼로는 ‘당신을 빨리 떠날 것 같다’면서 한 달 여 남은 결혼 25주년 기념 은혼식 선물을

리베라에게 먼저 주었다. 그리고 그날 새벽, 칼로는 폐렴증세의 악화로 고통과 고독 속에서 보낸 47년의 슬픈 생을 마쳤다

일기 마지막에는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 이라고 쓰여 있었다고 한다.

이 글로 일부 사람들은 그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지도 모른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칼로가 죽고 1년 후 리베라는 그녀가 태어나고 죽을 때까지 살았던 코요아칸의 ‘푸른집’을 나라에 기증했다

그녀의 집은 이제 칼로를 기리는 미술관이 되어있다.

 

1954년에 죽은 칼로는 1970년대 페미니즘 운동이 일어나면서 다시 한번 세계인들에게 재발견되었다.

그녀의 그림이 표현하는 솔직 담백한 여성성과 섹슈얼리티를 후세의 페미니스트들이 높이 평가한 것이다.

 

자신의 고통스러운 생을 강렬하고 충격적으로 그려냄으로써 관능적이고 개성 강한 자의식의 세계를 창조한 프리다 칼로

그녀의 작품들은 그녀의 인생과 무관하지 않으며, 자화상을 그림으로써 자신의 기억과 경험, 환상의 세계를 재창조했다

멕시코 토속문화와 결합된 초현실적인 화풍은 때로 그녀를 초현실주의자로 분류하지만,

그녀 자신은 초현실주의와의 연관성을 부정했다.

 

이는 그녀의 그림에 표현된 초현실적인 세계가 그녀에게 있어서는 ‘현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딸은 방문객이 멕시코 올 때마다 안내를 해서 이제 참신함이 떨어졌을 테지만

2013년인가 보내온 사진을 보고 참으로 부러웠는데, 이렇게 직접 다녀올 기회가 오다니

인생이란 기대와 기회의 연속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라도 희망을 잃지 마시고 소망하시고 기회가 오면 잡으시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