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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 파커 나이를 먹으면

생게사부르 2017. 10. 14. 11:08

도로시 파커 / 나이를 먹으면


 

 

 

 

 

 

나이를 먹으면



내가 젊고 담대하고 강했을 때는
옳은 것은 옳은 것이고 잘못된 것은 잘못 된 것이었다
나는 깃털 장식 세우고 깃발 날리며
세상을 바로 잡으러 달려 나갔다
' 나와라, 개새끼들아, 싸우자!'고 소리쳤다
한번 죽지 두번 죽느냐고 하면서 분해 울었다

그러나 이젠 나이가 들었다. 선과 악이
종 잡을수 없이 얽혀 있어
앉아서 나는 말한다. ' 세상이란 원래 그래
그냥 흘러 가는 대로 두는게 현명해
지기도 하고 이기기도 하는 거야
이기고 지는게 별 차이가 없단다, 얘야'
무력증이 진행되어 나를 갉아 먹는다
그것이 바로 사람들이 철학이라 부르는 것

 

 

*       *        *

 

 

제가 멕시코 있었던 지난 달,

집 없이 자주 이사다니기에 지친 최영미 시인이  ' 호텔 거주' 제안 때 자신의 로망이라며 언급했던,

호텔에서 거주하며 글을 쓰다가 결국 호텔에서 생을 마감한 도로시 파커의 시입니다.

 

매우 공감 갑니다.

 

저 역시 젊은 날, 옳고 그름에서 만큼은 칼 같이 분명했고, 미력하나마 제 위치에서 할수 있는 한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일조하는 삶을 살겠다고 개인적인 불이익이나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할 줄 아는 게 공부하고 책 읽는 일 밖에 없었지만

' 죽은 지식인' 이 되지 않기 위해 지행(知行)합일하는 삶을 신념으로 삼기도 했고,

부당한 권위를 행사하는 강한사람에게 강하고 자기를 보호 할 힘이 약한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실천하며 살려고 노력하기도 했고

눈 앞의 이익보다 역사의식을 지닌 삶을 살아야한다는 신념도 있었던 듯 합니다.

 

그러나 오십이 넘으면서...

세상이 꼭 공정하게 정의롭게 흘러가는 것 만도 아니고,

자신의 의지대로 될 수 있는 부분이 극히  제한적이란 것도 알게 되었고

' 있는대로의 세상' ' 다양한 삶의 방식' 을 인정하면서 한층 누그러지게 된 것 같습니다.

 

도로시 파커는 경제적인 일로 고통 받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인간의  존재로서의 고독함, 평범하지 못한 생활인으로서의 외로움 때문에 힘들었던것 같고,

주거 문화에 관한 한 미국과 우리의 인식이 다르지만 이번 한달 여행을 통해 일곱 군데 호텔,

에어 비앤비 형식의 민박 세 군데를 거치면서 ' 소유로서의 집' 이 아니라

필요에 의한 편리한 거주'를 이제 우리도 현실로 받아 들여도 될 것 같은데 말입니다.

 

어떻든 집 주인이 ' 맘 고생 시켜서 미안하다 일년 더 살라'고 해서 일단락이 되었고

세상살이에 서툰 독신 여성시인의 헤프닝으로 끝난 거 같습니다만 이럴 경우,

 

제가 맘에 드는 사람들은 문제를 가십거리로 만들어 왈가왈부하는 사람들보다 타인의 일이지만

자신의 일처럼 문제를 해결하는데 일조하는 사람들이 제일 존경스럽습니다.

( 물론 이번 문제에는 경제적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붙지만)

 

최영미 시인 팬 카페인지 북 카페인지

회원이었던 어느 의사 부부가 비용을 낼 테니 호텔에 머무르라고 했다는  얘기 같은 거 말입니다.

 

자존심 센 문학인들이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 문제를 떠나 ' 예술' 이나' 정신적 창작행위'에 대한

이해와 지지가 있는 부유한 사람들...

르네상스 시대 예술이 활발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거부들의 예술가 지원이 있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생계를 위한 일에 젊은 시절을 다 바쳤지만, 

전혀 생계로서의 현실에 도움이 못되는 ' 시와 음악과 그림 연극 영화' 도 세상살이에 위로가 되고

우리가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하다고 여기는 사람들,

육체적인 노동 말고도 ' 정신적 노동' (엄밀히 말하면 예술가들은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을 겸함)에 대한 가치를 아는 사람들

이슬 받아 먹고 살지 않는 한 예술행위에 몰입하려면 ' 먹고 사는 일'이 앞서 해결되어야 하기에 하는 말입니다.

기업과 맺어진 메세나 같은 게 있는 건 알지만 코끼리 비스킷 같아서...

 

인간은 지난 경험에서 뭔가를 배우는 유일한 種인지 모릅니다.

민주주의에 미숙한 정권들을 거치며 ' 블랙 리스트' ' 화이트 리스트' 파동을 겪었기에 

예술가들 본인의 양심과 사회 참여문제가 정치나 경제적 잣대로 재단되어 이용되거나 억압 받지 말기를

또 예술가들 자신도 예술가 본연의 양심을 상실하고 기득권에 편입하기 위해 세속화 하기를 서슴치 않는 일에서

자기 검열에 엄격하기를 ...

우리나라도 예술가들에게 좋은 날 오기를 기대해 봅니다.

 

 

최영미 시인이 언급했던 도로시 파커( Dorothy Parker, 1893년-1967. 74세 ) 삶을 소개 합니다.

 

    유명세를 누리고 명예를 지니기는 했지만 행복하지만은 않았을 것 같은 시인이

    자신의 전 재산을 마틴루터 킹 목사에게 남겼다는 일도 인상적입니다,

 

도로시 파커(1893~1967)는 신랄한 독설로 유명한 미국의 시인이자 단편소설 작가, 시나리오 작가, 비평가다.

어린 시절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두 번의 결혼과 이혼을 하는 등 불우한 생애를 보낸 탓에 도로시 파커하면

알콜중독, 섹스, 우울증, 자살 등 결코 일반적이지 않은 생을 살다가 뉴욕의 호텔방에서 외롭고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도로시 파커의 불우한 인생은 그의 직설적인 논평과 위트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전해진다.

 

     그녀는 주로 호텔에 투숙하며 글을 쓰기로 유명했는데, 뉴욕의 알곤퀸(Algonquin)호텔에는 '도로시 파커 스위트룸'이 있다.

 

     파커는 더 뉴요커 등의 매체에 문학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하였으며 알곤퀸 라운드 테이블을 설립 멤버 중 한명이 되었다.

     '알곤퀸 라운드 테이블'(Algonquin Round Table)은 1920년대 당시 미국 문학에서 가장 유명한 그룹인 '바이셔스 서클

      '(Vicious circle)이 주도한 비공식적 작가모임이다.

      파커는 1920년대 당시 알곤퀸 호텔에서 묵으면서, 알곤퀸 라운드 테이플의 창립멤버로 1919년부터 이 모임에 참여했으며

     도로시 파커 외에도 뉴요커 잡지 창립자인 헤롤드 로스(Harold Ross), 영화배우 로버트 벤츨리(Robert Benchley),

     하포 마스(Harpo Marx), 극작가 조지 S.코프만(George S Kaufman) 소설가 에드나 페버(Edna Ferber)등이

     알곤퀸 라운드 테이블의 멤버로 있었다. 

 

 

     존 F.케네디의 어린 시절 소원 중 하나가 알곤퀸 라운드 테이블의 멤버가 되는 것이었다고 전해질 만큼 당시로서

     는 주류적인 모임이었다

 

     

      멤버들은 뉴욕의 알곤퀸 호텔의 원탁 테이블에 둘러앉아 점심을 먹으며 시사와 문학에 대해 토론했다.

     알곤퀸 호텔의 라운드 테이블에서 많은 책과 영화가 탄생했으며 주간잡지 '뉴요커'(Newyorker)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뉴요커의 본사는 지금도 알곤퀸 호텔 맞은편에 위치해있다. 파커도 뉴요커에 논평을 여러편 실었다.

 

     1922년 파커는 '그런 작은 그림처럼(Such a Pretty Little Picture)' 이라는 제목의 첫 단편을 발표했다.

     1925년에 발표한 첫번째 시집 '이너프 로프'(Enough Rope)는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1929년엔 자신의 자서전인 단편소설 '빅 블론드'(Big Blonde)로 오 헨리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알곤퀸 라운드 테이블이 해체된 후 할리우드에 입성하고 영화 각본 집필을 추구하였으며 아카데미상 후보가 된 작품

     2편을 포함하여 할리우드에서의 성공은 좌익 정치에 관여했다고 하여 할리우드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도로시 파커는 보그(Vogue)와 베니티페어(Vanity Farir)에서 드라마 등의 논평을 쓰며 평론가로 일을 첫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신랄한 독설로 베니티 페어에서 해고된 이후 라이프 지(Life)로 자리를 옮겼다.

 

     파커의 이야기에는 가족, 인종, 전쟁 및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질문과 고민이 묻어나며 소외계층 문제에도 관심을 가져

     미국 내 흑인들에게 존경받는 인물이기도 했다.

 

     파커는 글을 쓰는 모든 분야에서 뛰어났다고 평가를 받는 천상 '글쟁이' 였던 모양이다.

     그는 1930년대 할리우드로 옮겨 1937년 영화 시나리오인 스타탄생(A star is born)을 써 아카데미 상을 받았다.

     파커는 정치적으로는 2차 세계대전 후 할리우드를 휩쓴 반공주의에 대항한 좌파주의 운동가이기도 했다.

 

     할리우드에서 두 번째 이혼을 맞은 파커는 다시 뉴욕으로 거주지를 옮겼으며 호텔에서 글쓰기를 즐겼던 그는

     1967년 뉴욕의 한 호텔에서 심장마비로 숨진채 발견됐다.

     파커는 흑인차별에 반대하는 의미로 마틴루터킹(Martin Luther King Jr.) 목사에게 전 재산을 남겼다고 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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