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안에서 익어가는 설움/김수영 비가 그친 후 어느 날- 나의 방안에 설움이 충만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오고가는 것이 직선으로 혹은 대각선으로 맞닥뜨리는 것 같은 속에서 나의 설움은 유유히 자기의 시간을 지켜갔다 설움을 역류하는 야릇한 것만을 구태여 찾아서 헤매는 것은 우둔한 일인 줄 알면서 그것이 나의 생활이며 생명이며 정신이며 시대이며 밑바닥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아아 그러나 지금 이 방안에는 오직 시간만이 있지 않느냐 흐르는 시간 속에 이를테면 푸른 옷이 걸리고 그 위에 반짝이는 별 같이 흰 단추가 달려 있고 가만히 앉아 있어도 자꾸 뻐근하면 가는 목을 돌려 시간과 함께 비스듬히 내려다보는 것 그것은 혹시 한 자루의 부채 -그러나 그것은 보일락 말락 나의 시야에서 멀어져 가는 것- 하나의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