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안도현 봄날은 간다

생게사부르 2018. 4. 2. 22:40

 

봄날은 간다 / 안도현

 

늙은 도둑놈처럼 시커멓게 생긴
보리밭가에서 떠나지 않고 서 있는 살구나무에
꽃잎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자고나면 살구나무 가지마다 다닥다닥
누가 꽃잎을 갖다 붙이는 것 같았다

 

그렇게 쓸데없는 일을 하는 그가 누구인지
꽃잎을 자꾸자꾸 이어붙여 어쩌겠다는 것인지
나는 매일 살구나무 가까이 다가갔으나
꽃잎과 꽃잎 사이 아무도 모르게
봄날이 가고 있었다
나는 호드득 지는 살구꽃을 손으로 받아들다가
또 입으로 받아먹다가 집으로 돌아가곤 하였는데


어느날 들판 한가운데

살구나무에다가 돛을 만들어 달고 떠나려는

한척의 커다란 범선(帆船)을 보았다

살구꽃을 피우던 그가 거기 타고 있을 것 같았다

멀리까지 보리밭이 파도로 넘실거리고 있었다

 

 

어서가서 저 배를 밀어 주어야하나

저 배위에 나도 훌쩍 몸을 실어야 하나

살구꽃이 땅에 흰 보자기를 다 펼쳐놓을 때까지

나는 떠나가는 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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