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등의 내재율/엄세원 까치발로 서서 책 빼내다가 몇 권이 기우뚱 쏟아졌다 중력도 소통이라고 엎어진 책등이 시선을 붙들고 있다 반쯤 열린 창문으로 햇살이 배슥이 꽂혀와 반짝인다 정적을 가늠하며 되비추는 만화경 같은 긴 여운 잠시, 일긋일긋 흔들린다 벽장에 가득 꽃힌 책 제목 어딘가에 나의 감정도 배정되었을까 곁눈질하다 빠져들었던 문장을 생각한다 감각이거나 쾌락이거나 그날 기분에 따라 수십 번 읽어도 알 수 없는 나라는 책 한권 이 오후에 봉인된 것인지 추스르는 페이지마다 서려 있다 벽 한면을 온통 차지한 책등의 숨소리를 듣는다 안쪽의 서늘한 밀착을 느낀다 표지가 서로의 경계에서 샐기죽 기울 때 몸 안의 단어들이 압사되는 상상, 책 갈피 속 한 송이 압화 같은 나는 허름하고 시린 과거이거나 목록이다 나는 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