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순 피어라 돼지 훔치지도 않았는데 죽어야 한다 죽이지도 않았는데 죽어야 한다 재판도 없이 매질도 없이 구덩이로 파묻혀 들어가야 한다 검은 포크레인이 들이 닥치고 죽여! 죽여! 할 새도 없이 알전구에 똥칠한 벽에 피 튀길 새도 없이 배 속에서 나오자마자 가죽이 벗겨져 알록달록 싸구려 구두가 될 새도 없이 새파란 얼굴에 검은 안경을 쓴 취조관이 불어! 불어! 할 새도 없이 옆방에서 들려오는 친구의 뺨에 내리치는 손바닥을 깨무는 듯 내 입안의 살을 물어 뜯을 새도 없이 손발을 묶고 고개를 젖혀 물을 먹일 새도 없이 엄마 용서하세요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할새도 없이 얼굴에 수건을 놓고 주전자 물을 부을 새도 없이 포승줄도 수갑도 없이 나는 밤마다 우리나라 고문의 역사를 읽다가 아침이면 창문을 열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