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길상호 신작시 먹먹
생게사부르
2019. 4. 17. 07:32
먹먹/ 길상호
유령은 향나무 밑에 앉아 먹을 갈아대고 있다. 그럴수록 밤은 더 어
두워지고, 그런다고 밤이 더 향기로워지진 않고, 이제는 당신을 위한
문장도 바닥이 보이는데, 슥슥슥 먹을 갈아대는 유령 때문에 오늘 또
사전을 펼쳐놓는다. 남은 단어들은 모두 물기 가득한 것 뿐이어서, 옮
겨 적으면 그새 번져 버리고 말 것들이어서, 먹이 닳아갈수록 밤의 꽃
들은 귀퉁이가 짓무르고, 간신히 지어낸 문장은 마침표를 찍기도 전
에 색이 변하고, 붓을 들어 몇 개 반짝이는 별들을 지워갈 때, 유령은
눈물을 몇 방울 흘려 넣으며 다시 먹을 간다, 슥슥슥 그렇게 우리들의
밤이 움푹 파이고, 먹먹한 밤이 거기 또 하염없이 고여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