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성미정 그놈의 커다란 가방 때문에
생게사부르
2018. 5. 1. 00:59
그놈의 커다란 가방 때문에 / 성미정
남편은 내가 끌고 다니는 커다란 가방 안에
무엇이 들어 있나 궁금해서 결혼했고
나는 남편이 내가 지고 다니는 커다란 가방을
받아주는구나 착각해서 결혼했고
결혼하고 나서도 나는 여전히 좀 더
커다란 가방만을 원했고
남편은 내가 온갖 잡동사니 쑤셔 넣고 다닐까
더 커다란 가방을 못 사게 하고
툭하면 좀 더 커다란 가방 때문에 다투면서도
나는 남편에게 더 커다란 가방이 왜
필요한지 이해시키지 못했다는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헤어지지 못하고
남편은 내가 자기랑 헤어지고 더 커다란 가방을
끌고 다닐 꼴을 못 봐서 헤어지지 못하고
오나가나 그놈의 커다란 가방 때문에
만난 우리는 그놈의 커다란 가방 때문에
헤어지지도 못하고
그런데 이 시를 읽고 계시는 극소수의 독자 여러분
(크지 않은 가방에도 충분히 들어갈 수 있는)
우리 부부가 헤어지지 못하는 이유가 정말
커다란 가방 때문일까요
1967년 강원도 정선
1994년 『현대시학』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대머리와의 사랑』(세계사, 1997)
『사랑은 야채 같은 것』(민음사, 2003)
『상상한 상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