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일상
류흔 비
생게사부르
2017. 6. 26. 01:55
류흔
비
몇 날 며칠을 비는 밖에 서 있었고
나는 거실에 앉아 있습니다
내가 커피를 마시면 비는 향기라도 맡을 요량인지
흠흠 창문으로 코를 갖다 댑니다
비와 나 사이에 침묵이 흐릅니다.
그의 얼굴이 보고 싶어서
벽을 헐어내고 유리창을 달았습니다만
온 몸을 으깨어 주룩주룩 내릴 뿐
나는 그것이 그가 침묵하는 한 방법이지
그의 눈물이라거나 감정일거라는
지극히 감상적인 표현을 삼가겠습니다
어쩌면 비와 나 사이에는
좁혀지지 않는 협곡이 흐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일테면, 수학시험지 위에서 빗발치던
사선의 붉은 색연필이라던가
오래전 헤어진 빗속의 여자 같은 추억 말입니다
어떤 세월을 들이밀어도 비는 목격자인 거지요
비는 은유를 모르며 비유의 천재이지요
내가 뭘 채우려 애쓴다면
비는 비우라 말할겁니다
어느 날 후둑후둑 느닷없이 뛰어 온 비가
어? 하는 사이에 온 몸을 핥고 지나갔지요
나는 따뜻한 샤워를 하며 그의 침을 닦아내야 했는데
비의 서늘한 혓바닥은 잊을 수 없어요
많은 날이 필요치 않았지요
그와 나 사이서
사이가 떨어져 나가기까지는
많은 세월도 필요치 않았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벗기기까지는
서로가 서로에게 젖기까지는
1964. 경북안동
2009. 한국문화예술지원 창작금
시집: 꽃의 배후